한겨레21 문화

추억에 잠긴 문화의 열병

(사진/광주 비엔날레)

올해는 복고의 시대라고 한다. 문화계에서도 그런 얘기가 들린다. 그 복 고의 대상이 어느 시대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 고 한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꼭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았던 기억만을 떼내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60년대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생각지 않고, 70년대가 좋았다는 사람들의 박정희의 시퍼 런 서슬을 잊고 있는 듯하다.

문화계에서 가장 복고 분위기에 들뜬 장르는 영화다. 그들이 그리워 다시 불러낸 장르는 멜로다. 70년대 우리를 한없이 울렸던 <미워도 다시 한번> 이나 <내가 버린 남자>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가 그 원조가 된다.

우리 시대 멜로의 대명사는 <접속>과 <편지>다. <고스트 맘마>를 시발탄 으로 꼽기도 한다. <접속>은 서울에서만 80만, 전국에서는 1뱍40만쯤의 관객을 동원했다. 60년대 ‘영화의 전성시대’에 필적하는 기록이다.

<접속>에 이은 이정국의 <편지>는 3주 만에 서울 시민 37만을 울렸다. 아 픈 남편과 착한 아내의 눈물겨운 순애보다. 올해 흥행순위 4위에 머물러 있지만 ‘계속 울고 싶은’ 갑갑한 현실을 감안하면 2,3위를 차지하는 것 도 시간문제인 듯하다.


멜로가 유일한 장르?… 노장들의 컴백

그러나 ‘복고·멜로의 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짭짤했던 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올해 서울에서 관객 10만 이상이 든 영화 는 14편, 그중 30만이 넘은 작품도 7편이나 됐다. 30만 이상이 든 영화가 2∼3편이 고작이었던 예년에 비하면 엄청난 흥행 성적이다. 제작자들은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적었다는 것은 복고였는지도 모르겠다. 60년 대에도 그랬다. 흥행은 잘됐지만 괜찮은 영화는 셀 정도였으니까. <접속> 과 올 초 나온 <초록물고기> <비트> 정도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 들마저도 지난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같은 새로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중평이다. 그래서 제2회 부산영화제에서는 “(회고전을 연)김기 영 감독 작품밖에 볼 게 없다”는 가시돋친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대중음악계에도 복고의 흐름은 있었다. 먼저 춘추전국을 방불한 댄스그룹 들이 복고를 상징했다. H.O.T의 <행복>이 1백만장 이상으로 가장 많이 팔 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를 이은 <질투> <타인>의 영턱스클럽, <폼생폼 사>의 젝스키스, <운명>의 쿨 등은 세련된 옛맛을 선보였다. 아마도 트로 트의 감칠맛이리라.

노장들의 컴백도 또다른 의미의 복고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산울림은 <무 지개>와 <전집>으로 새 해를 열어젖혔고, 신중현은 <트리뷰트(헌정)> 앨 범을 받았으며, 조용필은 16집 <이터널리>를 발표해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 미국으로 떠난 지 10년이 훨씬 지난 한대수는 홀연히 돌아와 공연을 벌 였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김현식의 라이브 앨범이 나왔다는 것이 다. 이들에게 복고는 록이다.

언더 음악인들이 오버로 진격한 것도 복고라면 복고다. 서구의 60∼70년 대를 향한 복고다. 지난해 드럭밴드들의 앨범이 나온 뒤 활발해진 이런 흐름의 선두에는 삐삐롱스타킹 출신의 권병준, 박현준, 신윤철, 옐로 키 친 등이 활동하는 ‘강아지 문화예술’이 있다. 여기서는 <원 데이 투어 스>와 <99&옐로 키친>이 나왔다. 올 말부터는 ‘인디’라는 레이블에서 언더 밴드들의 앨범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영화 <편지>의 한장면. )

이왕 나간 김에 복고로 쭉 가보자. 출판계도 복고였다. 3권짜리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가 1백만권 이상을 팔았다. 이 책은 잠언, 쉽게 말해 삶에 영양가있는 얘기들을 들려준다. 전두환 치하의 80년대에도 이 런 류의 책이 한때 유행했다. 라마 크리슈나, 크리슈나 무르티, 마하리시 마헤시 같은 요기들의 책이.

소설 <람세스>도 마찬가지다. 70만권이 팔린 이 책은 겉으로는 이집트 시 대로의 복고같다. 허나 사람들은 이것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읽었다. 엉망진창인 시대를 ‘앞으로 나란히’ 정리해줄 절대자에 대한 갈망이었 다.

문학에서는 아예 화두가 복고였다. 시작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반성이었 다. 80년대를 지양한 90년대 문학이 내용보다 형식미에 치우치니 내용과 형식미를 모두 갖췄던 70년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계간 <당대비평> 겨 울호 좌담 ‘문학은 다시 시대에 답할 수 있는가’, <문학과사회> 겨울호 에 실린 문학평론가 권성우의 글 ‘신세대 문학에 대한 비평가의 대화’ 는 이런 논쟁의 밑불이 됐다.

가장 논쟁적인 소재를 제공한 소설책도 그랬다.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이 는 이문열의 <선택>과 이인화의 <인간의 길>은 각각 조선조와 박정희 시 대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외쳤다. 어불성설이라고. 이 두 소설은 완성도와 관계없이 잘 팔렸고, 영남 남인, 박정희, 페미니 즘 등에 대한 격렬한 공방을 일으켰다.

클래식 음반시장에서는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크나페르츠부슈 등 옛 지휘자들의 전집류가 잇따라 나왔고, 중세나 르네상스 음악이 적잖이 소 개됐다. 이것도 복고라고 부르자.


제자리 맴도는 한국 문화의 탈출구는?

미술계는 복고에도 못 미친 ‘외화내빈’으로의 퇴행이었다. 올해 최대 행사로 꼽힌 제2회 광주 비엔날레와 강익중의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수 상 등은 ‘외화’다.

그러나 미술시장 개방 원년을 맞았음에도 이중가격제, 호당가격제 같은 전근대적인 시장구조를 온존시킨 것은 ‘내빈’이었다. 긴 불황 속에서 호앙 미로, 파블로 피카소 등 이름에 매달린 해외 유명 작가들의 함량 미 달 전시회가 관객들을 현혹했고, 오랜 불황을 돌파하려는 듯 그림값 재조 정을 내세운 유명 작가들의 ‘팔자 판’ 전시회 치중 역시 ‘내빈’이었 다. 화랑들은 새로운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 기획을 아예 포기함으로 써 70년대 ‘복덕방 화랑’ 시절로 후퇴했다.

연극계에서는 ‘다르시에’ 파문이 있었다. 국제적인 연극제인 ‘아비뇽 페스티벌’의 집행위원장인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는 서울과 과천에서 열린 세계연극제 참석차 한국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승무의 경우 프랑 스 관객과 예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 연극을 가지고 유럽의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을 확신이 안 선다.” 아비뇽 에 한번 가보자고 목을 뺐던 한국의 연극인들은 허탈해했고, 분노했다. 절치부심 분발할 수밖에. 유럽을 잣대로 삼았던 한국연극의 현대화 작업 은 어디로 가야 하나. 올 한 해 한국 연극계는 젊은 흐름과 기존의 흐름 이 충돌했다. 연극계에도 복고와 현대화는 화두가 될 듯하다.

복고의 안경을 쓰고 보니 복고와 관련없는 것이 없다. 사물을 한두 마디 말로 이름붙이려는 것도 알고 보면 다 복고적인 취미 아닌가.

한국 문화가 도돌이표를 그리며 제자리 맴을 돌고 있다. 98년 한국 문화 계가 복고를 깨고 현실로 돌아오기를, 미래로 달려가기를.

김규원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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