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극약처방, 모라토리엄은 오는가

(사진/통폐합대상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예금인출 사태를 맞았던 서울은행. 신문에 보도된 정부의 출자계획과 예금 보호 기사를 점내에 게시하고 이자율을 높이는 등의 조치로 겨우 예금주를 달랬다.)

한국경제 위기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가 더욱 가속 화되면서 국가경제 파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대내적으로는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금융공황, 대외적으로는 모든 채무의 지불을 유예 또는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현실화되고 있다. “어떤 특단의 전기가 마련되지 않고 이대로 가다간 한국경제의 파산이다.” 통화당국 한 간부의 침통한 말 속에는 ‘국가경제 부도’라는 벼랑에 몰린 비애감이 짙게 배어 있다.^
부도로 출발해 부도로 끝나는 악순환

외환위기의 심화는 IMF 지원 이후에도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 여건 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통화당국의 한 간부는 “해 외 금융기관들이 우리 금융기관들에 대한 외화대출 한도(크레디트 라인) 를 전혀 회복시키지 않은 채 좀더 두고 보자는 관망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 말한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최근 뉴욕시장에서 2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려다 현지의 싸늘한 반응 때문에 발길을 돌린 것은 이를 잘 반영해준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한보사태 이전까지 런던은행간 금 리(리보)에 0.25∼0.45%의 가산금리만 얹으면 가능했던 해외차입이 최근 에는 4∼6%의 가산금리 수준으로 치솟았고, 그나마 기존 거래선과의 오랜 신뢰를 토대로 극히 소규모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외화대출 한도 축소와 만기자금에 대한 연장 거부, 차 입금리 상승 등으로 외화부족에 몰린 금융기관들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하루 단위로 조달하는 초단기자금(오버나잇)의 누적규모는 최근 들어 1백 억달러를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외환사정도 최악이다. 금융계에서는 지난 12월5일 IMF로부터 55억달 러를 지원받았음에도 실제 가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고가 1백10억달러에 불과해 연말까지 돌아오는 외채상환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부족하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또 기업들이 해외에서 빌린 외채를 포함할 경우 1년 안 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외채의 총규모가 1천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외채 구조도 안 좋은 상태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현 상황에서는 자력으로 외채 를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외환보유고 부족에 몰린 한은은 환율이 연일 상승제한폭까지 오르는데도 시장개입은 엄두도 못낸 채 실수요 증명 을 첨부한 경우에만 부족한 달러를 하루하루 메워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 나마 달러부족 규모가 많을 때는 하루에도 10억달러를 넘어서 현재의 외 환보유고로는 ‘시한부 고갈’이라는 줄타기를 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는 달러당 2천원 시대 전망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원화 자금시장도 사정이 급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일 이후 14개 종 금사에 대한 업무정지, 고려증권 부도 등으로 부실 금융기관들에 대한 불 안감이 높아지면서 예금인출사태로 이어졌다. 종금사 업무정지로 7조3천 억원의 콜자금이 묶인 은행권은 정부의 강력한 종용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으로 영업을 하는 제2금융권에도 콜자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자금부족에 봉착한 금융기관들이 기업들에 대한 여신을 회수하면서 우리 경제는 다시 기업 연쇄부도→금융기관 부실→예금인출사태→금융기관 여신 회수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


“너무 가혹하다”와 “배부른 소리 말라”의 차이

외환위기가 풀리지 않는 근저에는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 국민을 믿지 못하는 해외투자가들의 불신이 깔려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디스와 S&P 등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에 대한 잇단 신용 등급 하향조정. 이들 신용기관들은 한국의 장기 외화표시 대출 및 채권 신용등급을 2∼3단계씩 내려버렸다. 특히 단기 신용등급을 ‘등급외’로 끌어내려 사실상 위험도가 너무 높아 투자가 불가능한 ‘쓰레기’로 취급 했다. IMF 등 국제금융기구와 외국 정부, 금융기관들은 한국이 IMF 지원 조건을 성실히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국 언론들은 한국의 기업과 국민들이 긴급자금을 지원한 IMF에 대해 “ 요구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면서 국치, 굴욕 운운하는 것은 너무 배부른 소리라는 지적이다. 일부 대통령선거 후보들이 IMF와의 재협상 거론에 대 해서도 민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의 약속이행 의지를 못미더 워하고 있는 터에 국제금융계의 불신감만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자 보도에서 “대선이 끝난 뒤 당선자가 IMF 권고이행 의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제2차 금융쇼크가 한국을 강타 할지 모른다”는 위협적인 표현까지 썼다. IMF도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의 근원을 도려내겠다는 의지가 한국 정부엔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는 지적까지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난 10일자 보도에서 “IMF 합의서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한국 정부가 2개 시중은행에 대해 직접 출자하기로 한 것은 금융산업 구조조정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 고 지적한 것은 한 예다. 국책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IMF는 내부적으로 기아자동차에 대한 공기업화 방침, 2개 시중은행에 대한 정부의 직접출자 방식, 부실 종금사 처리 등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나 금융기관, 기업끼리도 신뢰감이 깨진 지 이미 오래다. 국민 들은 정부보유 주식을 직접 출자해 부실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출 수 있도록 해주고 남은 16개 종금사는 반드시 살리 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고 예금인출을 하고 있다. 은행들이 정부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종금사 지원에 소극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중은 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은행들도 IMF가 요구하는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 기자본비율(8%)을 맞추기 위해 기존 대출을 회수하고 있는 마당에 종금사 들을 도울 여력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마당에 종금사들이 2개월간 여신회수 중단을 결의한 것이나 정부가 은행 신탁도 기업어음(CP ) 할인을 할 수 있도록 한 조처가 실효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 정부가 지 난 12일 한은을 통해 은행, 종금, 증권, 투신 등 금융기관에 11조3천억원 을 지원키로 하는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은 자금부의 간부는 “국가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경제 주체들이 서 로 믿고 개인적인 이익 챙기기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2차 자금지원 연기는 차기 대통령 길들이기?

(사진/구제금융에 합의서를 교환하는 이경식 전 한은 총재. 임창열 부총리, 캉드쉬 IMF 총재(왼쪽부터), 재협상 거론은 국제금융계의 한국에 대한 불신만을 키웠다. )

정부와 금융계에서는 IMF와 그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속을 챙기고 있는 미국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마 디로 무리한 요구로 한국 길들이기 또는 무장해제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일부에서는 IMF가 2차 자금지원을 대선 이후로 미룬 것은 차기 대 통령을 길들이기 위한 속셈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국 언론에서도 IMF의 프로그램이 한국경제를 수습하기보다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9일자 보 도에서 “IMF 대책은 경제활동을 지나치게 위축시켜 투자자들의 기대를 해치고 자본유입을 급속도로 자유화해 이번 사태의 원인인 금융시장의 취 약성을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구체적으로 △단기 금리를 21% 이상으로 올리고 △지난 1년간 원화가 급속 절하됐는데도 인 플레 억제목표를 5% 이하로 잡은 것 등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도 “IMF 대책이 교과서적으로 보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실정에 꼭 맞는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문제는 대안이다. IMF 등 국제금융기관과 선진국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한국경제가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없다는 데 고민이 있 다. 우리 경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은 바로 파국이라는 시각이 지 배적이다. 일부에서는 지난 82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멕시코의 예를 들 며 모라토리엄이라는 배수진으로 치고 IMF나 선진국들과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와 멕시코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는 지적이 많 다. 한은 조사부의 한 간부는 “멕시코는 석유 등 보유자원이 풍부하지만 우리는 자원이 전혀 없는 데다 수출 의존도가 높아 당장 경제가 마비상태 에 빠진다”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10∼20년은 국제적인 고아로 전락하고 경제가 북한 수준으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다” 고 우려했다.

정부가 IMF로부터 올해 안에 도입키로 한 90억달러 외에 국제금융기구와 미국, 일본으로 특사를 파견해 조기 자금지원을 요청하며 긴박하게 움직 이고 있는 것도 그만큼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이 각각 20억달러씩 총 40억달러를 연내에 지원하기 로 했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많다. 이에 따라 정부는 IMF에 이어 1백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일본으로부터 50억달러를 조기에 지원받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조기확대 , 채권시장 개방 확대에 이어 12월12일부터 기업 현금차관 허용 및 외화 증권 발행제한 폐지 등 달러가 들어오는 문을 더욱 넓혔다.


IMF는 모라토리엄 원치않는다

IMF로서도 한국이 모라토리엄 위기에 봉착한 데 따른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IMF 프로그램이 실패한 데 따른 후유증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미국(1백억달러), 일본(2백30여억달러) 등 우리나라에 채권을 갖고 있는 주요 선진국들은 당장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게 된다. 또 세계 11위의 경 제대국인 한국의 파산에 따른 국제경제의 파장도 각오해야 한다. 오는 15 일 이사회에서 금리는 높지만 대규모 자금을 단기간에 걸쳐 지원할 수 있 는 보완준비금장치(SRF) 도입문제를 논의할 예정인 IMF쪽에서 조기 자금 지원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이처럼 단기간에 외화부족을 해소할 수 있는 다각적인 노 력을 펴는 것과 함께 외국투자가들의 한국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도 록 기업 및 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 등 근본대책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 적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