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다시 광야에 선 당신에게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조금 수정돼야 한다. 역사는 승리 자 중 ‘극소수’의 기록이라고. 민(民)은 승리했다 해도 언제나 역사의 언저리에 있었다. 전투는 승리한 장수의 이름으로만 기억될 뿐이고 전리 품도 그들의 몫이었다.

농민 50여만명이 참여해 15만여명이 전사했다는 항일의병운동 역시 일반 역사책은 ‘선비들의 전쟁’으로 기록한다. 무장항쟁의 기치를 높이 세운 일부 선비의 공로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지금까지 의병은 고관 출 신의 민종식, 최익현, 허위 등의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왕조의 역사를 뒤바꾸고 역류하는 시대의 흐름을 바로잡아 역사의 기록자 인 기득권세력들을 굴복시킨 혁명적 사건에서만 민은 주역으로 잠시 등장 한다. 동학농민전쟁이 농민군의 이름으로, 4·19혁명이 학생과 시민의 이 름으로 그리고 6·10항쟁이 ‘민’의 이름으로 기록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귀결 역시 새로운 기득권자의 농단에 항쟁의 정신과 취지는 여 지없이 훼손되고 파괴돼왔다.

이 변칙은 거대 사건 속에서만 관철되지 않는다. 모래와 자갈이 쌓여 거 대한 퇴적층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일상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민의 땀과 눈물과 피로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적 성취는 박정희의 몫으 로 돌려진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논 틀대로 지금까지 민을 밟고 거대한 빚의 성을 구축한, 급기야 오늘의 파국을 초래한 재벌경제의 잘못은 외면 된다. 잘나가면 가진 자의 공로이며 꺾어지면 그 부담은 온전히 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지금 재벌의 모래알(빚)로 쌓아올린 욕망의 신화는 차례차례 허물어진다. 그에 따라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금융기관이 부실을 견디지 못해 뿌리 채 흔들린다. 결국 노사가 피땀으로 일군 건실한 중소기업마저 부도의 홍 수를 이룬다. 사업장이 유지된다 해도 동료들 사이엔 벌써 ‘밤새 안녕’ 이 인사다. ‘너 아니면 나’라는 약자들의 핏발선 생존싸움도 꿈틀댄다.

‘다시 광야에서.’

민은 이제 다른 선택이 없다. 원컨 원치 않건 다시 광야에 서야 한다. 민 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금자탑이 재벌과 권력의 턱없는 잔치와 끝모를 욕망으로 앙상한 골조만 남아버린 지금 이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은 저 들이 아니다. 저들에겐 그런 능력도, 다시 일어서자고 말할 양심도 없다. 개발독재의 엄혹한 채찍 속에서 땀과 눈물로 폐허를 일구고 그들의 오만 과 부패를 몸던져 거부해온 민의 몫이다.

어쩌면 오랜 싸움과 거듭돼온 박탈에 지쳤을지 모른다. 이제 돌봐야 할 부모님,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들 걱정이 앞설지도 모른다. 어쩌면 순 종하는 소시민의 삶에 조금은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루탄 난 무하는 거리이건 쇳가루 가득한 공장이건, 광야에 선 날들이 등 따순 구 들을 차고 앉았던 날보다 많았던 이들만이 희망을 세울 수 있다. 가깝게 는 노동법 항쟁을 통해 당신들은 그 희망을 몸으로 실천했다.

역풍은 거세다. 잔치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다 파먹은 김칫독이지만 여전 히 포기하기엔 아까운가 보다. 지난 87년 민의 이름으로 해체되었어야 할 안기부는 다시금 그 마지막 파수꾼으로 나섰다. ‘권력은 안기부에서 나 온다’는 명제를 확실히 증명해 보이려 세론을 뒤틀고자 안간힘이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청산이다. 욕망의 잔칫상과 그 주인공들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얼마 남지않은 이번 대선은 그 시작이 다. 어둠을 벗겨내고 굽음을 바로세워 밝음과 곧음을 널리 펼쳐내는 새로 운 건설의 첫삽을 뜨는 자리다. 이를 통해 이제 다시는 내줄 수 없는, 주 인된 민의 자리를 굳건히 해야 한다.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의 병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의병은 민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광야에서, 삭풍보다 더 찌르는 두려움을 털어내고 희망의 깃발을 높이 들 자.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