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
|
큰 아이는 세돌이 갓 지난 어느 일요일 낮에 대문 앞에서 세발자전거 위 에 올라 무엇인가를 잡으려다 미끌어 떨어져 팔꿈치를 찧었다. 팔꿈치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은 물론 그쪽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근처의 의 원을 찾았다. 의사는 다친 부위의 엑스레이를 찍는 등 몇가지 검사를 하 고는 골절이라고 하면서 내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그 여린 팔에 석고붕 대를 칭칭 감는 것이었다. 나는 의사면허는 있지만 전공이 전공이라 임상 경험이 없는 탓에 그저 그 의사가 어련히 잘 보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신 기해서 연신 석고붕대를 한 팔을 들여다보며 갈 때와는 달리 통증은 어디 로 갔는지 자못 의기양양해까지 하는 아이의 반대쪽 손을 잡고 집으로 돌 아왔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는 그게 아니었다. 석고붕대를 한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동네 의사의 진단과 치료를 어떻게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료 의사에 대한 직업적 믿음과 환자 아비로서의 의료 소비자 처지 사이에서 그날 낮과 밤 내내 적지 않은 갈등을 느꼈다.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 어머니와 아내의 성화에 못이기는 체 아이를 데리고 근무하는 학교 의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동기생인 정형외과 의사는 아이의 다친 팔을 가볍게 움직여 보고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하고 말했다. 내심 혹 시 했는데 역시였다. 어제 그 동네 의원의 의사가 잘못 진단하고 잘못 치 료하였다는 말이었다. 치료는커녕 아이의 팔을 석고붕대한 그 상태대로 얼마를 두었다가는 팔의 성장이 엉뚱하게 빗나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 요컨대 그 의사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명백한 의료과오를 저 지른 것이었다. 납득할 수 있도록 내게 몇가지 설명을 덧붙이면서 친구는 전날 감았던 석고붕대를 끌과 망치 등을 이용하여 세심히 풀고는 대신 아 이의 어깨와 팔에 끈을 걸쳐 놓았다.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보아서는 그렇 게 할 필요도 없겠지만 혹시 다친 팔을 많이 움직이게 되는 경우 아무는 데에 시일이 걸릴 수도 있어서 그런 치료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어 쩌면 작지 않은 의료사고로 번질 수도 있었을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요즈음 의료행위를 둘러싼 논쟁과 송사가 끊이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점 점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그러면서 의사들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15년 전 우리 가족이 경험했던 것과 성격이 비슷한 사건들, 즉 의료과오나 과잉진료 등이 그러한 논쟁과 소송, 불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이 의사의 실력부족이나 양심부 족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의사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열악한 의료환경 에서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탓을 돌리기도 하지만, 나는 의료환경 의 개선과 더불어 의사 스스로가 반성하고 행동과 마음가짐을 고쳐 나가 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의사들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현대의학 자체에 대한 회의나 거 부감에는 환자나 국민들의 이해부족과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적지 않 은 것 같다. 예컨대 멀쩡하던 사람 또는 가벼운 감기 증세 정도를 보이던 , 환자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을 치료를 한답시고 온갖 처치를 하여 진짜 환자를 만들어놓고는 금전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완전히 파멸토록 한다는 것이다. 그 환자에게뿐만 아니라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병을 의 사들이 제멋대로 창조해서 실컷 잇속을 차리고는 그 가련한 사람들을 죽 음의 늪으로 몰아넣는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의사들 의 행위는 부도덕과 비윤리를 넘어 가증스럽고 잔혹한 범죄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주장들은 거의 모두 질병, 특히 만성병에 대 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한다. 현대인들이 가장 무섭다고 여기는 암을 예로 들어보자. 경과가 빠르고 나타나는 증상도 뚜렷한 급성전염병들과는 달리 암은 대체로 몇해 또는 길게는 몇십년 동안 눈에 띄지 않은 채 자라 병으 로 발현하며, 발현하는 경우에도 감기 증세나 피로감 정도의 비특이적인 소견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직검사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만 그나마의 증상조차 아예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사들이 조기진단과 정 기검진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은 암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는 불치 는 아니더라도 치료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암의 그러한 속성을 제대 로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병원에 가서 졸지에 암환자 가 되어버리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시일이 더 지나 전형적인 암의 증상 이 나타나기 전에 발견된 사실을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양 오해하는 것이다. (제191호에 이어짐)
황상익/ 서울대 의대·의료사 및 의료윤리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