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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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상세대는 단편영화로 말한다." 이번 서울단편영화제에서는 출품작들의 실험정신이 돋보였다.)
젊음이 세상을 깨고 나가는 무기는 시대를 따라 변해 왔다. 70년대가 ‘ 우리 것’을 틀거리로 암울한 유신시대를 버팅겼다면, 80년대는 사회과학 의 이론으로 5, 6공화국의 압제를 치고 나갔다. 그렇다면 90년대는? ‘문 민’의 이름으로 우수수 흩어져버린 선배들의 이념 대신 그들은 영화를 거머쥐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중독아인 이들 영상세대는 “영화로 말하 겠다”고 선언한다. 투사의 시대는 가고 감독의 시대가 왔다.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5일까지 서울 삼성플라자 씨넥스에서 열린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는 국내외에서 몰려든 ‘비디오 키드’들이 자신들의 ‘영 상 발언’을 겨룬 자리였다. 역대 가장 많은 응모 편수인 1백21편이 예선 에 나와 16편이 본선에 들었다. 94년 제1회가 73편, 2회가 46편, 3회가 7 8편이었던 데 비하면 거의 50% 이상이 늘어난 셈이다.
“창조적 목소리 맘껏 내질러라”
집행위원인 김홍준 감독은 “본선 진출작을 통해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보 여주고 싶었다. 감독 지망생들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뛰어 놀 수 있는 영화제라는 걸 증명하는 잣대로 심사”했다고 말했다. 또 한 명의 집행위원인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얘기도 비슷하다. “가장 새로운 목소리, 창조적인 비전을 내놓은 영화를 뽑았다.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자 신의 표현을 극한까지 끌고가는 정신을 보았다.”
크게 국내파와 유학파, 전공파와 비전공파로 나눌 수 있는 이들 감독 지 망생들의 출품작은 집행부의 뜻대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렸다. 청소년기 의 반항으로부터 노년기의 평화까지, 또는 멀리 프랑스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찾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부터 초스피드 시대의 속력을 못따라가 미 쳐버린 남자의 비극까지. 미래 감독들의 카메라에 잡힌 이 세계는 분열중 이다.
12월5일 오후 7시, 폐막식에서 발표된 수상작들의 됨됨이는 심사위원단의 다양성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뻘인 원로 김기영 감독과 제3회 단편영화제 수상자인 정지우 감독, 홍콩의 스타 감독 왕가위와 한 국의 독립영화 감독 김동원으로 이뤄진 짝은, 여성평론가 김소영씨까지 가세해 의견이 일치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파노라마를 그렸다.
최우수작품상은 국내파인 정윤철씨의 <기념촬영>과 유학파인 송일곤씨의 <간과 감자>가 함께 받았다. 접점을 찾지 못한 심사위원단이 심사위원특 별상을 없애는 대신 두편의 수상작을 낸 것. 26살 동갑내기가 만든 두 작 품 모두 관객들이 수상 후보작으로 찍었던 화제작이었던 만큼 <간과 감자 >는 관객상, <기념촬영>은 시네마테크상까지 나눠 가졌다.
<간…>과 <기념…>은 지금 한국의 단편영화가 가고 있는 길을 두 갈래로 대변했다. 기술이냐 메시지냐, 완성도냐 현실감각이냐쯤으로 가를 수 있 는 틈새를 20대의 젊은 감독들은 각자의 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폴란드 우쯔 국립영화학교 감독과 3학년인 송일곤씨는 우수한 폴란드 영 화인력을 동원해 국제단편영화제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깔끔하고 미끈한 작품을 뽑아냈다. 인류의 원죄를 다룬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현대의 전 쟁터로 옮겨 폭력과 희생을 말하는 잠언처럼 구성한 이 작품은 2천3백만 원이 든 '대작'이다. 제작비의 70%를 학교에서 부담했다는 사실은 국내 감독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목이었다. “그게 폴란드 작품이지, 한국 작품 이냐”는 객석의 비판이 나온 건 당연한 결과다.
예술공헌상을 받은 뉴욕대 영화과 출신 조은령(25)씨의 <스케이트> 역시 특수한 필름 사용과 후반 작업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예다.
미국 뉴욕대나 프랑스 영화학교에서 날아온 유학파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이런 프로급의 후반부 작업은 열악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는 국내파들에 겐 탐나는 것이었다. 정부나 학교에서 물적인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영화 발전이 있다는 이들 나라의 이야기는 우리 정부가 귀기울일 만한 대목이 다.
이에 비하면 <기념촬영>은 ‘지금, 여기서’에 충실한 젊은 감독의 패기 가 만만찮은 작품이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용인대 영화과 대학 원에 다니는 정윤철씨는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수 법으로 그려 큰 박수를 받았다. 우수작품상을 탄 오점균(37·홍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씨의 <초촌면 신암리>는 유기농을 하는 한 농부와 시골 어 린이의 교감을 현장에 직접 들어가 찍어낸 사실성이 돋보였다.
또한편의 우수작품상 수상작인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는 퇴폐적이 고 그로테스크한 성 표현과 파격적인 영상언어로 화제를 끌어냈다. 동국 대 무역학과 출신의 김정구(27·지하창작집단 ‘파적’)씨가 만든 이 이 단아적 작품은 엄마의 사랑이란 숭고한 주제를 포르노와 폭력의 극단적인 이미지로 증폭시켜 야릇하면서도 불쾌하고, 섬뜩하면서도 감동적인 망상 으로까지 끌고나갔다.
다양한 화면 연출… 가능성 무궁무진
3회까지 영화제가 개최됐던 강남의 씨티극장에서 도심에 새로 문을 연 씨 넥스로 자리를 옮겨 열린 이번 단편영화제는 단편영화를 하고 싶고,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걸 입증했다. 심야상영까지 꽉 꽉 차는 영화광들의 열성,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쏟아지는 객석의 열띤 반 응 등은 ‘영화시대’를 실감케 했다.
객석에서 만난 박상우(30)씨는 영화로 쏠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화판에 뛰어든 ‘나도 감독’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단 편영화제가 독립영화의 발전보다는 충무로로 가기 위한 진입로쯤으로 수 단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비판을 던졌다. 또 “단편영화의 자유로움과 가능성을 열어줄 정부의 지원과 유통·배급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문자보다는 영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90년대 세대들의 몸과 목소리가 지 금 영화를 빌려 세상으로 날아들고 있다.
정재숙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