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는 기술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겨우 두번째 단편영화의 촬영을 마친 ‘어설픈’ 독립영화 감 독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어설픔도 93년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막 막함과 공포에 비해선 퍽 성숙된 것이다. 영화는 여전히 막연한 짝사랑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이젠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 스태프를 꾸리는 법, 창작의 고통에 대한 작은 이해를 가진 탓이다.

내가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으로 접한 곳은 93 년 독립영화협의회(이하 독협·02-237-0334)의 단편영화 워크숍을 통해서 였다. 대학 영화과 입학에 실패한 내게 영화를 가르쳐 줄 만한 교육기관 은 당시 전무했다. 더군다나 나는 전형적인 ‘비디오 키드’였다. 공부 대신 비디오 가게와 극장을 열심히 드나들었던 내게 도대체 나의 청소년 기를 암울하게 만들어 버린 영화란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했다.

독협 워크숍에선 여섯명의 다른 견습생들과 함께 요즘 <접속>으로 유명해 진 장윤현 감독에게 영화 연출에 대한 기본을 배웠다. 이 과정의 말미엔 공동창작의 형태로 16㎜단편을 제작하는데 결론부터 말해 대재난이었다. 기술적인 완성도는 논외로 한다 해도 조원들간의 호흡이 맞지 않아 바다 로 가야할 영화가 ‘산’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때 깨달은 건 영화가 공 동창작의 형태를 띠고는 있으나 누군가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며, 그 구실은 감독이 담당한다는 점 정도였다.

다음해엔 단편영화 제작으로 나름대로의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영화제작 소 ‘청년’(02-873-2378)에 가입했다. 당시 ‘청년’은 문화운동조직과 창작집단의 중간 과정을 지나치고 있었고 영화에 대한 의지가 치열하지 못한 사람은 버텨내기 힘든 집단이었다.

나는 영화학교 대신 ‘청년’에서 영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웠 다. 영화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 영화 감상은 철저히 주관적으로 할 수 있으나 만드는 것엔 치열한 자기 검증과 객관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 등이 그 요지다. 아무튼 나는 ‘청년’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영화에 관련 된 일을 하게 되었고 2년여의 숙고 끝에 본격적인 단편 데뷔작을 만들게 되었다. 그 중간중간 내가 스태프로 참여한 몇편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좋 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내 첫번째 단편도 사실은 ‘청년’의 조직력에 의존한 바 컸다. 이것은 그만큼 영화가 시스템의 예술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지 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장르영화적으로 보여주려한 첫번째 영화는 몇몇 비 경쟁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방송의 전파를 타기는 했으나 한국에서 개최된 모든 경쟁 단편영화제에서 고배를 마셨다. 어떤 저명한 선배는 너는 연출 보다 기획이나 시나리오가 어울린다고 점잖게 조언했다. 당시 나는 영화 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두려움, 공포,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짝사랑의 절망감. 그래도 나름대로 씩씩하게 영화의 길을 걸어 왔고 아주 작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가속도를 낼 준비를 하 고 있으므로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영화를 전공하지 않아도 영화 만들기를 제대로 배울 수 있 는 교육기관이 많아졌다. 한겨레 영화제작학교(02-710-0182), 문화학교 서울(02-595-6002) 같은 시네마테크에서 상당히 전문적인 과정을 가르치 고 있다. 하지만 모든 영화의 선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화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인 것은 책으로도 충분하다. 일본 감독 기타 노 다케시는 부산영화제에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은 영화의 테크닉만을 배우려 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이 정작 공부해야 할 대상은 인생 자체다.”

임필성/독립영화감독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