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

청와대·재경원은 거듭된 경고 묵살했다

(사진/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법의 국회통과를 위하여 로비에 전력했던 강경식 전 부총리. 재경원 내에서도 "강 부총리가 국가운명을 걸고 도박을 벌였다"라는 개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국은행이 지난 11월6일 외환위기로 인한 한국경제의 파탄을 막기 위해 서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시급히 요청해야 한다는 긴급보고 서를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제출했는데도 강경식 전 부총리 등 재경원과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묵살하고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밝 혀졌다.


한은,1년6개월 전부터 외환위기 경고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정식 요청한 것은 한은의 긴급건의가 있은 지 보름 뒤인 11월21일로, 이 기간중 우리 경제는 외환시장은 물론 금융, 주 식시장이 파국으로 치달아 결국 정부가 IMF와의 협상에서 굴욕적일 정도 로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만든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재경원은 한은이 1년6개월 전인 지난 96년 중반부터 은행과 종합금융 사 등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금 조달여건이 갈수록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 외환위기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도 묵살하고 대책마련 을 소홀히 해 피할 수 있었던 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감사 원이 지난 12월6일 끝난 한국은행 감사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밝혀져,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한국이 경제주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재 경원 등 금융당국 관계자들의 직무유기 여부 등 책임규명 작업에 결정적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외환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7일 “기아사태 해결로 안정세를 찾아가던 외 환시장이 홍콩 증시폭락에 직격탄을 맞아 11월 초를 계기로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고 외화차입 길이 막힌 부실 종금사들과 은행들의 외화부도 를 막아주기 위해 한은이 매일 수억∼수십억달러를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면서 “더이상 한국정부 자체 힘만으로는 외환위기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한은이 11월6일 IMF 구제금융 요청을 공식 건의했다”고 말했다. 11월 초 당시 외환당국은 외환보유고가 10월 말 현 재 3백5억달러라고 밝혔으나 국내은행 해외 현지법인들의 지급불능사태를 막아주기 위해 빌려준 70억∼80억달러를 뺀 순수 외환보유고는 2백여억달 러 수준에 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강경식 부총리 등 재경원과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들은 한은의 이런 긴급보고서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다가 8일 뒤인 11월14일에야 비로소 김영삼 대통령에게 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검 토하고 있다고 처음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시안 월스트리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미국의 블룸버그통신 등 외국 언론들이 연 일 한국의 외환위기를 1면 머릿기사로 크게 보도하는 가운데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에도 환율 폭등세가 이어지면서 외환보유고 고갈 위기를 느낀 정 부가 환율방어를 사실상 포기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뒤였다. 또 개별적 인 해외차입 길이 끊긴 시중은행과 종금사 대표들이 IMF 구제금융 신청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손을 들어버린 상황이었다. 김 대통 령은 강 부총리로부터 보고를 받을 당시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고 있었냐”며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보고 직전까지만 해도 강 부총리 등은 상황이 어렵지만 정부가 노력하 면 IMF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강 부총리의 이런 판단에는 IMF 지원요청이 임 기말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김 대통령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겨 줄 것이라는 걱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다른 청와대 관계 자도 “김 대통령의 보고 라인은 재경원과 경제수석실 외에도 많기 때문 에 강 부총리의 보고 전에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대통령으로서도 대선을 앞두고 경제난을 초 래했다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개혁법안 처리 국가경제 담보로 도박

강 부총리의 IMF 구제요청 검토 보고는 지난 15, 16일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한 캉드쉬 IMF 총재가 강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 재와 잇따라 만나 IMF 구제금융 신청을 종용했던 시점 직전이어서 대통령 보고 자체가 외환위기 상황에 대한 정부의 능동적 판단에 따른 것이기보 다는 캉드쉬 총재 방한일정에 떠밀려 이루어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강 부총리 등 재경원의 금융정책실 핵심 관계자들은 사태가 가장 급박 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일주일 이상씩 ‘선 금융개혁법안 처리, 후 금융시 장 안정대책 발표’라는 배수진을 친 채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법 등의 국회통과 로비를 위해 여의도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재경원 실무자들 사 이에서조차 “재경원이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을 오랫동안 염원해 온 것 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그런 문제에 매달릴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 “강 부총리가 국가경제를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개탄 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금융계의 한 간부는 “재경원과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한은의 긴급보고서 를 묵살하고 대통령에게 제때 보고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판단착오 또는 직무유기”라면서 “강 부총리는 경질 직전까지도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가 충분하며 경상수지가 대폭 개선되고 성장률이 6%대를 기록하는 등 우 리 경제의 기본체질이 좋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며 상황을 호도했다 ”고 지적했다. 또 외환당국의 관계자는 “한은 긴급보고서가 나온 시점 부터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11월21일까지 보름 사이에 국내 금 융시장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됐고 막판에는 실제 외환보유고가 70억달러 밑으로 떨어졌다”면서 “국가경제가 총제적인 대외지급불능사 태 직전까지 몰린 상황으로 IMF와의 협상은 일방적으로 요구조건을 받아 적는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고 시인했다.

또 한은이 지난해 중반부터 국내 금융기관들의 △단기해외차입금리 상승 △만기가 하루짜리인 초단기 콜자금의 거래 증가 △만기1년짜리 단기외채 증가 등을 이유로 은행과 종금사들에 대한 외자유동성관리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제출했음에도 재경원이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번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던 종금사 등에 대해 특별대 책이 필요하다는 한은의 보고서는 올들어 더욱 늘어 지난 11월까지 13∼1 4차례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를 경고하 는 한은의 보고서는 한보사태가 터진 뒤인 올 2월부터는 거의 매달 한번 씩 제출됐으며 외환위기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10, 11월에는 더욱 집중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특히 한은은 보고서를 통해 이번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된 종금사에 대해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들여와 외화대출, 증권투자, 외화리스 등 장기자 산에 운영함으로써 만기기간 불일치에 따른 위험도가 높은 것은 물론 수 익성은 높은 반면 위험성도 높은 동남아, 중남미, 동유럽쪽 외화증권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다”고 경고하고 은행과 마찬가지로 국제결제은행(BI S)의 자기자본비율(8%) 기준을 적용해 자산운용의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 다는 건의를 감독당국인 재경원에 제출했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불가피

감사원은 이와 관련 지난 11월20일부터 12월6일까지 3국 1과 직원 16명을 동원해 실시한 한은 감사에서 재경원과 청와대에 제출한 보고서 일체를 제출받아 한은이 외환위기와 관련해 적절히 대응했는지 여부를 정밀조사 중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한은에 대한 조사결과가 나오는 대로 재경원 등에 대한 후속 감사가 불가피한 것은 물론 야권이 요구하고 있는 진상조 사 및 책임자 처벌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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