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이인제, 혁명의 나팔을 분다

(사진/이인제 후보는 서민들의 불만을 한껏 자극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전략을 짜고 있다.)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아 끓어오르는 서민층의 불만과 위기의식에 불을 당겨라.”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의 막판 전략은 ‘혁명’이다. ‘특권층=한나라당= 경제파탄 주범’으로 몰아붙이면서, 서민들의 불만을 한껏 자극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이 후보 자신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조 만간 국민의 분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 후 보는 자신의 행보를 ‘정치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다 최근에는 명예를 뺀 ‘정치혁명’으로 좀더 강한 톤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막판까지 ‘주적’은 이회창

이 후보 진영의 강경 기조는 후보 등록 직전 18∼20%선의 3등으로, 최악 의 상황까지 하락했던 지지율이 최근 바닥을 치고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난 12월1일 텔레비전토론에서 점퍼 차림으로 이회창 후보를 강력하게 몰아붙이고, 벽지 곳곳을 버스유세로 누비고 다 닌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유세를 통해 이번 대선은 특권층 의 무능과 부패를 심판하는 무대라고 연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전략기조는 사실 11월4일 창당 이후 ‘와이에스 신당설’ 공세의 역 풍에 휘말려 지지율이 떨어지면서부터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수·기득권층의 거부감이 역풍의 실체이며, 그런 정서가 보수 언론을 통해 증폭됐다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이 후보 진영은 이에 따라 11월14 일 ‘정세변화에 따른 신전략 기조’라는 문건을 통해 서민의 편에 서서 기득권층의 부패상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후보 진영은 이런 기조가 12월3일로 IMF 구제금융 시대가 개막되면서 더욱 절묘하게 적중되고 있다며 막판까지 같은 기조를 한층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따라 이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 김윤환 한 나라당 선대위원장,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김인호 전 대통령 경제수석 등을 ‘정축국치 5적’으로 규정하고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후보 진영의 ‘주적’이 막판까지 이회창 후보라는 점은 여러 측면에 서 흥미롭다. 우선 두 후보의 지지층은 상호호환성이 가능한 길항관계가 있어 이회창 후보를 끌어내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표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 후보는 주초에 영남 훑기를 다시 시작한 데 이어 충남북 강원 경기 동북부 등에 유세를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비DJ성향 ’ 표가 있을 만한 지역에서 이회창 후보와 정면 승부를 편다는 구상인 셈이다. 서울의 경우는 거리유세 등 지상전보다는 이슈 싸움을 통한 공중 전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이 감안됐다.

당내에서는 이와 함께 대선 이후 국민신당의 진로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 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만일 이인제 후보가 낙선할 경우 이회창 후 보보다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정치인 이인제’의 재기에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세대교체가 안 되면 정권교체라도 돼야 한다”며 “DJ가 집권할 경우 이인제씨가 야당의 젊은 기수로 재도약할 여지가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의 낙선과 함께 한나라당 이 붕괴하면서 정계개편이 시작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전제로 ‘비DJ성 ’ 야당의 구심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인 셈이다.

이 후보 진영은 이에 따라 막판 비장의 카드로 이회창 후보 둘째아들 수 연씨의 키 조작 병역기피 의혹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89년 12월 ∼90년 1월 사이에 서울대병원에서 뗀 병사용 진단서를 입수해놓고 있다 는 것이다. 이 후보는 애초 IMF 협약 서명 다음날인 지난 4일 대전 기자 회견을 통해 이 ‘물증’을 공개하려다가 ‘국치일’ 직후라는 국민정서 를 고려해 일단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종 카드 아직 살아있다”

진영 내부에서 거론되는 또 한가지 막판 카드는 박찬종 신한국당 고문의 영입이다. 박 고문은 지난 1일 돈암동 집으로 찾아온 이 후보 일행에게 입당 의사를 비치며 당 총재 자리 등을 요구했다가 일단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국구 의원 배지를 버리고 국민신당에 합류한 이만섭 총 재에게서 총재 자리를 회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이 후보가 밝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고문 카드가 아직 살아있다고 보는 것은 이 후보의 지지율 반등세가 가시화할 경우 박 고문이 ‘백의종군’이나마 선택할 가 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측근들은 “박 고문에게 별도의 조건을 제시하는 등 영입에 연연할 생각은 없지만 본인이 알아서 결심하 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