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김순경의 맛기행

향수 달래는 '녹두 빈대떡'

녹두는 그 쓰임새가 다양해 예로부터 귀한 먹거리로 여겨왔다. 크기는 콩 이나 팥알보다는 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연한 녹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녹두알 같다’ 또는 ‘녹두빛 같다’는 고유의 생김새와 빛깔로 예쁜 모양새와 색상의 기준을 삼기도 한다.

녹두는 습한 들밭보다는 물이 잘 빠지는 산지의 자갈밭에서 잘 영근다. 이 때문에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강원도와 전북의 산간지역에서 재배된 것을 더 알아주고, 먹는 방법도 이들 고장에서 다양하게 이뤄졌다. 녹두 묵, 녹두죽, 녹두전, 떡고물, 그리고 싹을 낸 숙주나물과 당면 등은 하나 같이 별미 아닌 것이 없다.

녹두묵은 청포라 해서 묵 가운데 가장 매끄럽고 찰지며, 여기에 치자물을 노랗게 들인 황포는 전주비빔밥에서 빠지면 안 되는 귀물이다. 녹두죽은 입맛이 없거나 열이 많이 나고 혈압이 높은 환자의 간병식에 더없이 좋다 . 숙주나물은 요리재료로 다양하게 쓰일 뿐 아니라 유명한 평안도 만두의 맛을 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또 인절미의 흰 고물은 녹두만한 것 이 없다. 잡채의 주재료인 당면도 녹두로 만든 것이라야 제맛이 난다.

이처럼 다양한 맛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을 꼽는다면 역시 빈대떡으로 불리는 녹두부침이 아닐까 한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겨울철에 부쳐먹는 녹두 빈대떡은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이 일반 상차림에 쓰이는 전이나 적, 또는 부침류와 개념이 다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전원(田元)의 빈대떡은 함경도 태생인 주인 지인자(5 4)씨가 직접 부쳐내는 것으로 이북 고유의 녹두 빈대떡 특성이 제대로 담 겨 있다. 지씨의 고향에서는 ‘녹두지짐’이라고 해야 더 친숙하다는데, 빈대떡은 원래 평안도에서 전래된 것이라 평안도식 이름인 녹두지짐이 그 대로 전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식구들끼리 먹으려고 이런 저런 속을 넉넉하게 넣어 격식을 따지지 않고 부쳐낸 것을 녹두지짐 또는 그냥 지짐이라 불렀고, 손님상에 내기 위해 속을 좀더 맛깔스럽게 넣고 정성을 들인 것은 빈대떡이라 했다고 한다. 아무튼 빈대떡은 그 본고장 사람들이 월남해 대를 잇는 동안 이제 전국 어디서나 녹두부침의 대명사 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씨의 함경도 빈대떡은 고유의 평안도 지짐처럼 두툼하고 푸짐하다. 녹 두를 하루쯤 푹 불려 껍질을 말끔히 벗겨낸 다음, 맷돌에 너무 묽지 않게 갈아놓는다. 여기에 속으로 고사리와 도라지를 맛있게 볶아 섞는다. 경우 에 따라 숙주나물과 김치도 넣지만 김치를 너무 우리지 않아야 김치가 씹 히는 맛이 있다. 김치의 새콤한 맛이 손님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어 집에서 먹는 것만 김치를 넣는다고 한다.

고기도 원래는 돼지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져 넣든가, 돼지고기와 쇠고기 를 섞어 함께 다져 넣어야 제맛이 난다. 하지만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손 님도 있어 아예 쇠고기만 넣는다는 것이다. 지져내는 기름도 일반 식용류 보다는 돼지비계를 번철에 꾹꾹 눌러 기름을 짜내며 부치고 기름이 빠진 비계살이 부침 속에 간혹 섞여 들어가야 제맛나는 함경도 녹두지짐이 된 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유를 잃어버리고 입맛이 변하면서 이렇게 하지 못 하는 것이 퍽 아쉬운 표정이다.

함경도에서는 이렇게 부쳐놓은 빈대떡을 바람이 잘 통하는 싸리 채반에 펴서 베보자기를 씌운 다음, 시원한 곳간 시렁에 얹어 놓고 두고두고 먹 었다고 한다. 찬 곳에서 하루나 이틀쯤 지나면 뚝뚝 끊어질 정도로 굳어 진다. 이것을 데우지 않은 채 그냥 손에 들고 떼어 먹으면 금방 부쳐낸 것과는 또다른 맛이 나면서 그렇게 고소할 수 없다. 알맞게 썰어 된장찌 개나 청국장을 끓일 때, 다 끓고 난 뒤 몇점 얹었다가 된장국물과 함께 먹는 맛도 별미다. 그래서 이북이 고향인 50∼60대의 실향민들은 빈대떡 에 얽힌 이런저런 향수가 차가운 겨울날씨와 함께 퍽 그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지방질 풍부해도 소화력 뛰어나다

녹두는 콩이나 마찬가지로 지방질이 풍부하고, 그러면서도 소화력이 뛰어 난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녹두에 들어있는 지방은 불포화 지방산이 기 때문에 성인병을 크게 염려할 것 없고, 효소작용도 뛰어나다. 라이신 과 바린이란 성분이 주축을 이룬 필수 아미노산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서도 녹두는 해열과 고혈압, 숙취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래서 혈압이 낮은 사람들은 간을 알맞게 해서 돼지고기와 육류를 넣고 부 친 것이 오히려 좋다.

전원(02-549-2269)에서는 겨울철 특별메뉴로 내놓고 한 접시 석장에 6천 원을 받는데 옛 향수를 느끼고 싶은 고객들을 위해 주문도 받는다고 한다 . 큰 되로 한되에 30장이 나오는데 값은 4만5천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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