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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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노총대표자회의 한국노총은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김대중 후보 지지를 간접적으로 알렸다.)
이번에는 깬다. 올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노동계가 노 동조합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선거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다. 노동법에서는 정치활동을 허용하면서 선거법에서는 금지하고 있는 ‘교묘 하게 어그러진 현실’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양대노총 모두 ‘악법은 어겨서 바꾼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상 김대중 후보 지지 표명
이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일찌감치 ‘악법 어기기’에 나선 상태다. 권영길 위원장을 ‘국민승리 21’ 후보로 내세운 민주노총 은 지난 11월9일 노동자대회를 비롯해 각종 집회에서 권 후보에 공개적인 지지를 선언해왔다. 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특정 정당이 후보에 대 한 지지·반대를 못하도록 규정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87 조와 89조의 2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친노동자적인 후보와 정책연합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총) 역시 선거법을 어겨서라도 정책연합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사실 한국노총의 움직임은 민주노총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 던 게 사실이다. 합법의 테두리 안에만 있던 한국노총이 ‘악법 어기기’ 에 나설 경우 상당한 파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4일 단위노조 위원장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전국대표자 대회는 한국노총의 이런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장이었다. 이 대회에 서 한국노총은 사실상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를 에둘러 밝혔 다. 정책연합 후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는 애초 계획보다는 후퇴한 것 이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여당을 지지하는 일부 보수적 인 연맹위원장들의 강한 반발과 공개적인 지지를 피해달라는 국민회의쪽 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코 노조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선거법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변명처럼 들리지만은 않는다. 실제로 정책연합을 포기시키기 위한 한나라당의 움직임은 무척 분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노총 박 인상 위원장에게 날마다 전화를 거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는 김문수 의원 등 당 관계자들이 직접 찾아와 다그치기 도 했다. 또 친여 성향의 연맹위원장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항운노련·선 원노련·연합노련 등 10여개 산별연맹 위원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 1월 총파업 때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한국노총의 변화와 개혁을 늦추고 있다는 게 노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연합을 이 정도나마 이끌어온 요인으론 구속을 각오한 박인상 위원장의 의지가 꼽힌다. 박 위원장은 지난 1월 총파업 이후 한국 노총을 개혁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울러 한국 노총이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주범인 ‘신한국당 심판’과 ‘정 책연합’을 대선전술로 일찌감치 확정한 뒤 전례없이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4차례에 걸친 여론조사는 물론 지난달 20일 에는 김대중·이인제·이회창 세 후보를 초청해 이들의 노동 관련 공약을 알아보는 텔레비전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관변노조 오명 벗는 계기 마련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게 ‘정책연합 대상 선정 평가표’다(<표> 참 조). 한국노총의 요구에 대한 정책수용도 및 실천가능성 5백점, 자체 조 합원 여론조사 및 신문·방송의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당선가능성 4백점, 도덕성 1백점 등 1천점을 만점으로 평가를 매겼다. 이 평가표에서 김대중 후보가 5백점을 얻어 이인제 후보(2백46.3점)와 이회창 후보(2백4 0.4점)를 크게 앞섰다. 김 후보가 이렇게 높은 점수를 얻은 데는 6개월간 의 임금 동결과 함께 정리해고를 2년간 유예한다는 계획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다른 후보들은 사실상 정리해고를 뜻하는 노동시 장 유연성 강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이런 평가표마저 공개하지 않은 것은 노동조 합의 자주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지적이 한국노총 안팎에서 만만찮게 나오 고 있다. 정책연합 후보를 공개 선언하지 않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그동안 벌여온 정치활동의 최종결과물을 그대로 묻어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정책연합에 대해 노조가 주도하지 못하고 정당에 끌 려다닌 ‘소극적인 정책연합’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 다. 이는 당선된 후보가 공약을 실천하지 않을 경우, 이번과 같은 정책연 합에서는 마땅히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렇다고 한국노총의 이번 정책연합이 갖는 의의를 깎아내릴 수는 없어 보인다. 먼저 한국노총 자체 조직적인 차원에서는 노조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인 조직 운영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지난 1월 총파업 참여에 이어 ‘관변노조’라는 인상을 씻 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는 이번 정책연합이 한국노총 안에 있는 개혁 세력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라는 평가로도 연결된다. 더 중요하게는 한국 노총이 노조의 정치활동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본격적인 걸음을 내디뎠다 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한국노총 한 관계 자의 말에서 보이듯 대통령선거일까지 정책연합 후보를 위해 직접적인 선 거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미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는 5백인 정책연합실 천단을 중심으로 4일 이후부터 각 지역에서 홍보물을 만들어 직접적인 선 거운동에 나설 계획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달 28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선거법에 위배된다 며 정책연합 자제를 요구하자, “앞으로 헌법소원과 국제노동기구(ILO) 제소 등 모든 대응을 다할 것”이라고 밝힌 것에서도 한국노총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은 정치적, 경제적 차별 을 받지 않는다’고 돼 있고,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협약 제87조는 ‘정부가 노조의 모든 활동을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규정 하고 있다.
여기에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독자 출마의 길을 가고 있는 민주 노총 역시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권영길 ‘국민승리 21’ 후보를 위한 조 직적인 지지활동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과 민주금속노련 단병호 위원장 등 4명이 권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는 이유로 검찰로부터 두 차례 출두명령을 받았으나 모두 이를 거부한 상태다.
재계 공세 맞설 양대노총 공조 가능한가
정치세력화를 위한 길은 다르지만, 양대노총 모두 ‘악법 어기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한국노총의 정 책연합을 바라보며 재야노동계의 한 원로가 하는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어려운 경제를 틈탄 재계의 총공세가 시작되고 있다. 그만큼 내년도는 양대노총의 공조가 더욱 필요한 때다. 한국노총의 정책연합 실현은 그 나 름의 진보로 보도록 하자. 크게 보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만난다.” 별다른 실효성 없는 보수정당과의 정책연합으로만 보지 말고 열린 마음으 로 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노총 전국노조대표자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 3일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극복과 고용안정을 위해 노동계 단일의 공동대책기구를 만들자 고 한국노총에 제안했다. ‘정책연합’이라는 나름의 진보를 끌어낸 한국 노총에서 어떤 답변이 나올지 기다려진다.
조준상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