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극우 검찰, 엉뚱한 칼질

(사진/졸지에 반체제 문인으로 낙인찍힌 유홍준, 신경림(왼쪽부터)씨.)

“영장? 아… 이장희 교수 영장! 조금 전에 들어갔지 아마.” 지난달 25 일 오후 4시께 서울지검 청사 9층 공안1부장실. “영장을 쳤냐(청구했냐) ”는 기자들의 물음에 검찰 관계자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97년 겨울 검찰의 ‘공안한파’가 지식인 사회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지난 12월4일 오후 5시30분께 서울지법 11층 영장전담판사실. 3시 간에 걸친, 이례적으로 긴 영장심사를 마친 최중현 판사가 검찰이 재청구 한 영장에 막 기록을 끝내고 일어섰다. “이 교수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 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볼 수 없어 이적 성을 단정하기 어렵다.”

“김 총장 의지 많이 작용했다”

열흘이라는, 아주 짧은 동안 실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초등학생용 통일교육 교재 <나는야, 통일 1세 대>(천재교육)를 펴냈다는 혐의(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로 청구된 이 교수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은 다음날 국가보안법 사건으로는 무 척 이례적으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끝에 기각됐다.

그러나 같은 날 성균관대 앞 논장서점 주인 이재필(31)씨 등 대학가 서점 주인 두명은 같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어 28일에는 박지동(58) 광 주대 교수가 지난해 4월 대학 신입생용 교양교재로 펴낸 <진실인식과 논 술방법>이 새삼스레 문제가 돼 책을 쓴 지 1년7개월여 만에 구속됐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 등에 실린 일부 문인의 글을 검찰이 문제삼아 교육부에 삭제를 요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대검 공안부가 지난달 말 각 부처 합동 공안대책회의 석상에서 “교과서에 실 리기에 부적절하다”며 유홍준 교수, 시인 신경림·고은, 소설가 채만식 등 모두 7명의 문인이 쓴 글을 다음 2000년 교과서 개정 작업에서 아예 들어내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은 “이념적으로 백지장과 같은 중·고생들이 보는 교과서에는 완전 히 모범적인 글만 실려야 한다”며 “훌륭한 사람들의 글이 많은데 굳이 체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글을 교과서에 실을 이유가 없어 개 정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3일 이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이 재청구됐다. 검찰은 한번 법원 이 기각한 영장은 좀처럼 재청구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일부 우익인사의 감정서까지 덧붙여 영장을 다시 청구했다.

이쯤되면 가히 ‘공안몰이’라고 할 만하다. 무슨 새로운 일도 아닌, 가 까이는 2년 전에 쓴 초등학생용 참고교재가, 멀게는 일제시대에 쓴 단편 소설이 새삼스레 검찰의 도마에 올랐다. 왜 이 책들이 지금 문제가 되는 가. 검찰의 공식적인 ‘해명’은 이렇다. “오래 전에 검토했던 것을 이 제 처리한 것뿐이다.”

검찰의 이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한 관계자는 “이 교수나 박 교수가 쓴 책자의 이적성 여부는 대검에서 오래 전에 검토작업을 마쳤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실제 영장청구도 각 지검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 니라 대검에서 지시가 내려와 이루어진 것”이라고 ‘실토’했다.

대검, 특히 검찰 수뇌부의 이런 ‘의지’는 이 교수에 대한 영장 재청구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5일 이 교수에 대한 첫번째 영장이 기각됐 을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장의 공식 반응은 “영장 재청구는 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밤 12시가 넘어 각 언론사에는 대검찰청 공보관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곧 보강조사를 벌여 영장을 재청구한다는 것 이 검찰의 방침입니다.”

그렇다면 검찰 수뇌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하필 대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민감한 시점에서 해묵은 책들을 문제삼는가.

아무래도 그 의문의 실타래를 푸는 데는 최근 터진 고영복 교수 사건이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될 듯하다. “최근 고 교수 간첩사건을 계기로 지 식인 사회에서 안보의식의 틈이 벌어진 것을 크게 우려하는 사회적 여론 을 감안했다”는 박 교수 사건 주임검사(광주지검)의 말은 검찰의 속내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문제가 터진 김에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보 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손을 보고 넘어갈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상의 ‘ 고백’인 셈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대통령 선거라는 시기적 특수성도 충 분히 고려됐음직하다.

검찰의 또다른 관계자는 “김태정 (검찰)총장의 개인적인 의지가 많이 작 용했다”는 말로 배경을 설명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평소 공안문제 에 별 관심이 없던 그가 법무부 차관 시절 한총련 사건 등을 치르면서 우 리 사회의 이념문제, 특히 지식인 사회의 ‘좌경화’에 대해 나름의 시각 을 갖고 대처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태백산맥>도 손댔어야 하는데…”

거기에 검찰 내 ‘매파’의 의지가 보태졌다. 검찰 공안분야의 최고 이론 가로 꼽히고, 올해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해 사실상 와해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한 고영주 대검 공안기획관(연수원 8기)을 비롯한 몇몇은 이번에 도 강경론을 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소설 <태백산맥>은 나오자마자 의율했어야 하는데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그만 ‘실기’하고 말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는 그는 , 특히 이번 교과서 개정 요구를 강력히 밀어붙였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더라도, 한 가지 분명하고, 또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검찰이 과거와 달리 정권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독자 적인 판단과 필요에 따라 일련의 ‘공안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미래의 ‘독립된 검찰’을, 오히려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강희철 기자/ 한겨레 사회1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