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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성 양심수들의 고통을 고발한 2백10번째 탑골공원 목요집회. 형이 확정된 10명의 여성 양심수들이 차가운 독방에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매서운 바람을 타고 동장군이 참석자들의 얼굴을 할퀸다. 민주화실천가족 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지난 12월4일 개최한 2백10번째 탑골공원 목요집 회. 여느 때보다 눈물이 많았다. 추운 날씨 탓만은 아니다. 여성 양심수 들이 겪는 고통의 증언이 참석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늦둥이 외동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일흔이 넘은 한 어머니. 5년3개월 째 원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함정희(33)씨의 어머니 장성례씨다. 그는 딸 때문에 겨울이 싫어졌다고 한다. 온기 하나 없는 차디찬 감옥에서 딸이 손발이 차가워지는 수족냉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화 차단된 독방생활에 언어능력 상실
90년 민중당 활동을 하기도 한 함씨는 대통령선거를 3개월 앞둔 92년 9월 공안당국에서 발표한 이른바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함씨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 역당 소속이라고 발표했으나, 함씨 등 관련자들이 한결같이 이를 부인하 자 1심 재판에서 소속단체의 명칭을 민애전이라고 바꾸었다. 이렇게 석연 치 않게 만들어진 게 민애전 사건이다.
7년형을 받은 함씨의 죄명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국가기밀탐지누설죄 ’이다. 하지만 그는 합법적으로 출판된 단행본과 농업관련 자료 목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함씨는 올 1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은 국가기밀에서 제외된다”는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재심을 청구해 재판 계류중이다.
함씨와 같이 민애전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지난 10월23일 만기 출소한 손 민영(35)씨가 밝히는 여성 양심수의 실상은 가혹하다. 97년 11월 현재 형 이 확정된 여성 양심수는 10명이다.
이들은 청주교도소를 빼곤 모든 교도소 여사(女舍)의 0.75평 독방에서 혼 자 지낸다. 비디오 시청은 물론 운동이나 15분간의 목욕도 전담 교도관의 감시 아래 이뤄지는 등 24시간 일대일 밀착감시를 받는다. 심지어 무엇을 하는지 30분 단위로 전담 교도관이 자세히 기록하는 경우까지 있다. 다른 정치범과는 달리 일반 재소자와 대화도 못 하게 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끊긴 채 외로움이 극에 이르면 언어능력을 잃기도 한다. 손씨가 이런 경우다. 감옥살이 3년째이던 해 손씨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 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고 사소한 일상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날마다 한 시간씩 큰소리로 책을 읽고 노래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후유증 으로 지금도 하루 두서너 시간밖에 정상적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여성 양심수들은 여성용 신발·속옷·양말 등 최소한의 필수품도 구하기 어렵다. 남성용이거나 남성에게 맞는 치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리대 등 여성용품은 1가지 종류에 치수도 2∼3가지뿐이다. 독거자가 당연히 받아 야 할 난방용 온수를 공급하지 않는 교도소도 많다. 이 때문에 96년 김천 소년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이승미씨는 햇볕 하나 안 드는 독방에서 6개월 을 지내야 했다. 출소한 지금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온몸 통증으로 일상생 활마저 힘든 처지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탓에 여성 양심수 대부분은 수족냉증·생리불 순·하혈 등 각종 부인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다. 함정희씨의 경우 이빨 이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 잇몸이 퉁퉁 부은 채 제대로 치료 한 번 못받 고 최근까지 몇년을 견디고 있다고 한다. 사노맹 사건으로 92년 4월 구속 돼 지난 6월23일 만기출소한 은수미(35)씨는 감옥에서 결핵이 점점 악화 했다. 엑스레이를 찍기는 했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연 4회 있는 건 강진단이 완전히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교도소에는 재소자 5백명이건 1천명이건 담당의사는 한명뿐이다.
형식적 건강진단에 결핵 오히려 악화
95년 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청주교도소에서 수감돼 있는 문 순덕(32) 전 슈어프로덕츠 노동조합 위원장에게는 이보다 더 큰 고통이 하나 있다. 교도소쪽에서 아들 한솔(6)이와 만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 이다. 문씨의 남편 김성식씨도 국보법 위반으로 95년 구속·수감돼 있어, 현재 한솔이는 문씨의 후배가 돌보고 있다.
△94년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파동’이 부른 마녀사냥의 희 생양이 된 바이올리니스트 안윤정(33)씨 △89년 독일녹색당 초청으로 간 독일에서 만난 재일교포와 인사를 나눴다는 이유로 구속된 이윤정(42) 전 광주시의원 △92년 민애전 사건으로 구속된 변의숙(31) 전 협성사 노동조 합 사무국장 △95년 한국대학생총연합 대표로 방북했던 정민주(25)·이혜 정(23)씨 △94년 ‘조문파동’ 때 구속된 강정희 전 전남대 총여학생회장 △96년 연세대 사태와 관련해 구속된 박현정 전 조선대 총여학생회장과 정선 전 덕성여대 총학생회장.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나머 지 여성 양심수들이다.
조준상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