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흔들리는 갈대, 박찬종

천주교 통일 성전 건립기념식에서 이인제 후보, 김대중 후보와 나란히 한 박찬종 고문. 3당 모두 '박 고문 모시기'에 지극한 정성을 쏟고 있다.)

조직보다는 국민을 직접 상대하기를 좋아하는 ‘밑바닥 정치인’ 박찬종 한나라당 고문이 15대 대선을 앞두고 헤매고 있다. 그가 14대 대선 때 개 척한 ‘박찬종식 유세’ 즉, 돈 안 드는 길거리 유세는 이번 대선전에서 각 후보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막판 하 차한 박 고문 본인은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이인제 후보 등 3명의 유력 후보 가운데 누구에게 정을 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 고 있다는 것이다.


모시기 경쟁에 돈암장 문턱이 닳는다

이에 애가 단 3당 후보쪽은 부산·경남 지역과 수도권에서 나름대로 일정 한 지지기반이 있는 박 고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일 경쟁적 으로 구애작전을 펴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가 12월1일 밤 박 고 문의 자택인 돈암장으로 직접 찾아가 협조를 부탁한 데 이어 최병렬 공동 선대위원장과 조순 총재도 박 고문 잡기에 나섰다. 조 총재는 5일 아침 박 고문과 만나 조속한 당무 복귀를 간청했다. 국민신당의 사절단도 1일 밤 돈암장을 찾았다. 2위 탈환을 노리는 국민신당의 노력은 더욱 간절하 다. 서석재 최고위원과 한이헌 김운환 의원 등 부산 출신 의원들이 하루 가 멀다 하고 박 고문을 찾고 있다. 국민회의도 박 고문에게 공을 들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11월 중순 김대중 후보의 장남 홍일씨가 돈암장을 찾 은 데 이어 김 후보의 측근 인사와 안동선 지도위부의장 등 당 지도부가 직접 나섰다.

3당 후보쪽의 이러한 박 고문 모시기 경쟁은 한 표라도 더 늘리려는 선거 판의 생리상 나름대로 납득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을 즐기는 듯한 박 고문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가 많다. 특히 이 과정에 서 ‘정치적 흥정’설까지 흘러나오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박 고문은 현재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는 세 후보를 모두 협력과 협상의 상대로 하고 있다. 이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후보와 손잡겠다는 표시로 비친다. 더구나 그는 현재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입장이다. 한 다리는 특정 정파에 들여놓고 다른 정파와 제휴를 타진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정치적 소신이나 신의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박 고문이 요구했거나 각 후보쪽이 제의한 것으로 알려진 협력 의 ‘조건’들은 정치를 싸구려 흥정대상으로 떨어뜨렸다는 지적이다. 박 고문은 한나라당의 협력 요청에는 전국구 의원직의 조기 승계와 이회창 후보의 자택 방문 등 모양새 갖추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구 의원직 조기승계를 위해 황우여 의원의 사퇴나 차기 승계자인 이찬진 ‘ 한글과컴퓨터’ 사장의 전국구 예비후보직을 반납하는 방안을 ‘건의’했 으나 당사자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 후보와 조순 총재가 없는 바쁜 중에도 박 고문을 차례로 만나는 등 모양 새 갖추기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국민신당에는 총재직 요구

국민신당쪽과는 당 총재직을 놓고 흥정을 벌였다고 한다. 박 고문쪽의 총 재직 요구에 대해 이인제 후보는 “의원직까지 버린 이만섭 총재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 총재가 “당에 도움이 된다면 양보하겠다”고 해 국민신당쪽은 총재직 제공 의사를 박 고문에게 전달한 상태이다.

국민회의도 박 고문과의 일련의 접촉을 통해 ‘책임 총리나 서울시장 등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 의는 또 “우리 당에 들어오기 힘들면 아예 국민신당에 가는 게 어떠냐” 고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3당 모두 박 고문에게 최대한의 조건과 예우를 갖춘 채 그의 결심을 기다 리고 있는 셈이다. 판세가 불확실한 선거전으로 인해 ‘아무 거나 찍으면 되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 박 고문이 교묘한 3중 플레이를 통해 몸값 올리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 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박 고문의 한 측근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박 고문 본인외에 는 아무도 모른다”면서 “이런 상태라면 대선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선 택도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도 “박 고문 은 현재 하루에 열두번도 마음이 더 왔다갔다 한다”며 “3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워낙 심약해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판단 불능 상태 에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8일 제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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