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진정으로 청산할 것

김형태/ 변호사

대선이 한달도 안 남았다. 5년 전, 10년 전 모진 겨울 추위 속에 보라매 공원으로 대학로로 몰려다9

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열정은 이제 간 곳이 없다. 92년 겨울 한 좌담에 서 시인 고은은 그 열정의 패배를 ‘가뜩이나 황량한 겨울 산천에다가 실 의와 낙담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우수로 가득차 있는 터’라 표현했다. 계 속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당선자쪽에 표를 던진 사람들은 축제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가슴속에 재 한삼태기씩 퍼 담고 있는 허탈로부터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국가기밀누설죄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다시 대선을 앞둔 이 겨울 그때 기쁨을 누렸던 이들 마저도 지금은 가슴속에 재 한 삼태기씩을 담고 있다. 수백억달러에 이르 는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빌려와야 나라가 유지되고 내년 외채규모는 1천 5백억달러를 넘어서 세계 1위의 외채국이 될 것이라 한다. 우리 살림을 우리 손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국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이 현실의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일까 대통령? 장관? 재벌? 한나라당 으로 이름 바꾼 신한국당? 그 책임의 마지막 소재는 이러한 체제를 선택 하고 지지한 국민에게 있다. 늘 국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외치는 대통령담화에 화를 낼 자격이 우리에게는 사실 없다. 우리가 뽑아 주었으 니까. 나는 안 찍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없다. 이 나라는 같은 운명의 공동 체이므로.

92년 겨울의 좌담에서 백낙청 교수는 이런 고백을 했다. “목전의 개혁이 라는 면에서도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선 즉시 기득권세력과 새로운 관계정립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김대중씨보다 어떤 면에서는 김영삼씨가 한정된 개혁을 하기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도 생각했지요. 그러나 큰 흐름으로 볼 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일어나는 이 사회의 변화는 설혹 김대중 씨가 막으려 한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대세를 이룰 것이고 반면에 김 영삼 정권이 이룩할 변화라는 것은 아무래도 그 개인의 돌파력과 추진력 에 주로 의존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에 역시 이번에는 바꿔보자는 민주당 의 구호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동안 민자당 정 권이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이상 다른 정당을 통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정도이기도 하고요.” 5년 전 이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의 대 상이 될 수 있는지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3김청산이 최대과제라 주장하기도 한다. 3김청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청산하자는 것인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언뜻 이해하기 로는 자연인 김씨 세 사람의 얼굴을 더이상 보기 싫다는 원초적 감정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닌가 싶다. 3김이 40여년을 우리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 으니 아무리 잘 생긴 얼굴에 좋은 일을 했다 가정해도 이제는 싫증이 나 고 지겨울 때가 되기는 했다. 감정으로 싫은 것을 어쩌랴. 하지만 92년 대선결과를 기뻐했을 이들 중 그 누구도 5년 뒤 이 나라의 파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보면 감정으로 선거를 할 일은 아니다.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우리가 이번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말로 청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연인 아무개가 아니라 우리를 이 지경으로 빠 뜨린 제도와 의식이니 바로 지난 50년간 우리를 눌러온 분단의식, 지역주 의 그리고 성장제일주의이다.

엊그제에도 간첩사건 발표가 있었다. 분단의식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 해 온 세력들은 때를 놓칠세라 남한에 친북세력이 4만이라며 진보를 말하 는 이들에게 모조리 간첩혐의를 두고 있다.

간첩은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자인데 방송사나 해안초소위치와 한국의 현 재 외환보유고나 단기 외채상황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외국으로 누설되어 서는 안 될 국가기밀인가. 경제를 파탄내고 외국에서 돈을 꾸어오기 위해 비밀 중의 비밀인 외환보유고, 단기외채상황을 알려 주도록 만든 사람들 이 더 큰 국가기밀누설죄를 지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국가 기밀을 누설하고 있는 편에서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간첩운운하며 자신들의 더 큰 잘못을 덮으려는 태도야말로 이제는 청산되 어야 한다.

또 참담한 겨울을 맞을 것인가

지역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우리가 남인가 하는 한마디 구호에 따라 지지율이 급등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와 남을 기준으로 매사를 편갈라 처리하다 97년 이 겨울이 이렇게 참담해진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 하는 것인지. 이번 선거에서 다시 지역주의가 모든 이성적 논의를 압도한 다면 정말 희망은 없다.

그리고 또하나의 청산대상인 경제성장제일주의는 이제 이 나라를 세계 제 1의 외채국으로 만들었고 곧 수많은 노동자들을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내몰 것이다.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리고 빚 끌어다 쓰고 뇌물주어온 재벌들이 다시 그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는 이시점에서 선택의 기준이 3김청산 운운하는 감정적 수준인가.

분단의식, 지역주의, 성장제일주의를 조장하는 사람이라면 세 사람 김씨 아니라 이나라 6백만 김씨라도 다 청산해야 할 것이요 반대로 3김청산의 구호 뒤에 숨어서 이 세 가지를 온존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야말로 국 민들이 눈 바로 뜨고 청산해야 한다. 5년 뒤 다시 지금처럼 온 국민이 가 슴속에 재 한 삼태기를 퍼담고 있지 않으려면 냉철한 이성으로 진정 청산 해야할 것을 청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