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정축년 국치’ 원흉이 누구냐

(사진/강경식 전 재경원 장관. 기아와의 힘겨루기와 금융개혁법안 처리에 매달리다 실낱 같은 기회마저도 놓쳐버렸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부도유예”, “경제주권 상실”, “2류국가로의 전락”.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 국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탄식들이다. 당면한 외환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 었고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사태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냐는 탄식이 뒤따르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징보는 한보사태부터 보였다

“과중한 단기외채 부담과 부동산 담보대출의 부실화, 대기업들의 확대지 향적 경영.” 국제통화기금이 최근 내부 정보자료를 통해 한국경제를 위 기로 몰아넣은 원인으로 꼽은 3가지 원흉들이다.“한국이 갖고 있는 1천 백억달러의 채무 가운데 무려 8백억달러(73%)가 1년 안에 만기가 도래하 는 것들”이라는 IMF의 지적이 우리 정부 발표치에 비해 과장됐는지는 모 르지만 “단기외채의 부담으로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금융기관들이 도산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은 정확했다. 얼마나 이익 을 내느냐는 것보다는 외부차입에 의존한 채 외형 부풀리기와 순위경쟁에 몰두한 한국 대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이들에게 거액을 대출해 준 금융기관들마저 연쇄적으로 부실이라는 수렁에 빠진 것도 사실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준경 박사는 “30∼40년간 지속된 관치경제 속 에서 쌓여온 고름이 개방경제 아래에서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금융과 세제지원 등 각종 특혜 속에서 경쟁력은 없으면서도 덩치만 키운 재벌기업들과, 엄격한 대출심사 는 뒷전으로 한 채 권력자들과 관료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은행 금 고문을 활짝 열어 준 금융기관들은 모두 관치경제가 낳은 사생아들이다. 기업의 연쇄부도, 금융기관의 부실화로 인한 위기의 가능성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 한보사태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시중은행의 한 외환 딜러는 “일반국민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국내 금융기관들이 대외신인도가 떨어지면서 해외차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한보사태 때부터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어려움이겠거니, 좀 시간이 지나면 나 아지겠거니” 하는 생각에 위기의 징후들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지난해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서두를 때 일부 학자들이 “OECD 가입을 위해 개방을 앞당기다가 제2의 멕시코사태를 맞을 수 있다”며 경 고한 말이 공연한 ‘넋두리’로 흘러간 것처럼.

정부가 대기업들의 연쇄부도를 막는다며 지난 4월에 만든 부도유예협약이 별다른 구실을 못하고, 급기야 7월 들어 재계랭킹 8위의 기아그룹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사태의 긴박성은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3개월여 동안 강경식 경제팀이 기아 경영진들과 소모적인 힘 겨루기만을 벌이면서 일을 결정적으로 그르쳐 버렸다.

동남아에 유행병처럼 돈 외환위기와 함께 병든 환자의 심장에 마지막 칼 을 꽂은 것은 11월 이후 강경식 경제팀의 도박. 달러를 구하지 못한 금융 기관들이 매일매일 부도위기라는 칼날 위에서 곡예를 할 때 강 부총리를 비롯한 재경원 금융정책실 핵심 멤버들은 보름여 동안 여의도 국회로 출 근해 금융감독기구 통합 등 금융개혁법안 통과에 매달렸다.

재경원 안에서조차 “강 부총리가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한다”는 지적이 공공연히 흘러나왔지만 “수출이 늘고 있고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줄어드 는 등 우리 경제의 기초여건은 건실하다”는 말만 주문처럼 되뇌었다. 급 기야는 “추가 금융시장 안정대책은 금융개혁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 발표 하겠다”며 금융개혁법안 처리에 미온적인 야당의원들을 협박했다. 항의 시위를 하는 한은 직원들을 경찰서로 연행하는 강경수까지 동원했지만 결 국 금융개혁법안은 정부 뜻과는 반대로 선별처리됐고, 그사이 한국경제는 자체회생을 위한 실낱 같은 희망을 상실했다.


금융시장 안정대책도 시기 놓쳐

강 부총리 대신 새로 취임한 임창열 부총리가 19일 오후 부랴부랴 금융시 장 추가 안정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외자도입 방안이 빠져 버린 대책에 대해 외신들은 “내용이 충분치 않고, 발표시기도 늦었다”고 일제히 타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22일 특별담화문에서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해 위기극복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을 발표한 임 부총리의 입에서 “한국이 흔들리면 미국,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자해성 협박과 “ 금융개혁법안이 빨리 처리돼야 한다”는 말이 되풀이 되는 현실에서 정부 를 믿고 고통을 분담할 국민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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