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지식산업이 경제를 살린다

(사진/창조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소프트웨어 산업구조로 바꿔야 한다. )

사람의 근육이 기계로 대체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기 계를 부수며 저항했다. 이제 다시 기계를 사람이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육이 아니다. 사람의 지식과 감성이 기계를 대체하려 한다. 기계 체계가 사람의 재부상에 강하게 저항한다. 그러나 승패는 이미 갈렸 다. 기계 체계는 더이상 지탱할 힘을 잃었다. 한국이 자랑했던 건설, 철 강,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 거대한 기계 공장들은 그 운영체인 재벌들 의 연이은 도산과 더불어 공룡 같은 몸을 떨구며 엄청난 먼지 구름을 일 으킨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벗지 못한 김영삼 정권의 무기력도 기계 시대 의 종언을 알린다.

세세한 정책의 실패가 아니다. 경제 패러다임의 붕괴다. 재벌들은 경쟁 기업들 때문에, 혹은 개별 기업의 무능력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들이 발을 디딘 땅이 갈라지고 있기 때문에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지식 과 감성이 부상하자 기계들이 급속히 부식한다. 금융 정책을 바꾸고, 규 제를 일거에 풀고, 경제 장관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 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도 큰 문제는 아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가장 근본적인 것을 바꾸는 일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21세기 경제 패러다임 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식을 세우면 기계가 사람으로 바뀐다

패러다임 전환 기획의 첫 걸음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지식산업 중 심의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특히 지식경제의 기반인 정보기술(IT), 그중 에서도 소프트웨어 산업의 토대를 닦는 일이다. 제조업과 지식산업의 차 이는 아주 간단하다. 제조업의 엔진은 기계였다. 지식업의 엔진은 사람이 다. 기계를 사람으로 바꾸는 이 단순한 차이에서 거대한 패러다임이 갈린 다. 기계 공장을 키우려면 적절한 입지를 고르고 정부의 정책과 부동산을 담보로 자금을 동원하면 됐다. 노하우는 서구의 것을 복제한 일본 것을 다시 복제하면 된다. 사람은 단순 노동력이므로 한국의 교육열에 의해 생 산된 중급 인력을 유신시대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면 됐다. 그러나 지식 시대는 다르다.

지식경제의 핵심 에너지는 창조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세계는 새로 운 엔진인 지식 인력을 준비하지 못해 현재 40만명의 정보인력 자리가 비 어 있다. 우리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최신 기술을 익힌 소프트웨어 프 로그래머를 구하는 일은 관련 기업들의 스트레스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 게 변하는 정보기술에 대한 최신 지식을 갖춘 인력들, 이들을 양성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대학 교육이 바뀌어야 하고, 기업도 학교 기능을 갖춰야 하 며, 세계적인 지식시장에서 경쟁할 정도로 지식생산의 수준을 높여야 한 다.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먼저 할 일은 지식산업의 인프라, 즉 지 식인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지식산업을 움직일 사람이라는 신종 인프라가 구축되면 체계 변동의 힘이 축적된다. 지식 경제는 지식의 양과 질, 그리 고 창조성 등 지적 능력뿐 아니라, 모험적인 감성도 요구한다.

박정희 패러다임에서는 국가와 재벌이 경제를 결정했다. 국가는 정책과 금융을 통해 재벌들에게 준독점적인 시장을 보장해 주었고, 재벌들은 정 치자금과 수출진흥으로 여기에 보답했다. 재벌들은 그룹 내부에 준영주 체계를 형성했다. 자회사들은 그룹 내부시장을 통해 상호를 부조함으로써 기술개발과 혁신에 게을러도 살 수 있었다. 내부시장을 넓히기 위해 순익 증가를 희생하면서 무모하게 사업을 확장했고 권력층을 매개로 금융 대출 을 차입했다. 국가가 시장을 막아주었을 때만 해도 이런 체계가 유효했다 . 이제는 아니다.

기성조직 타파할 모험을 감행해야

국가나 기업은 위계적인 조직과 문화로 자원을 동원했다. 그 결과는 조직 에 대한 지식의 종속이다. 사람들은 회사에 들어가면 몇년간 선배들에게 배우다 관료주의 체계에 흡수되고, 대리, 과장, 부장의 위계를 올라가기 위해 사내 정치인들이 되어 버렸다. 우수한 지식은 윗사람에게, 그리고 상부 조직과 정부 로비를 위한 정치 감각으로 변질되었다. 강조되는 것은 충성이었다. 모반에 대한 두려움은 조직인의 예절이 되었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거대 조직은 창의성을 부양할 수 없다. 고로 이제 지 식은 그 스스로를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이 기성 조직으 로부터 독립할 정도로 모험성을 가져야 하고, 사회는 이런 모험적 지식을 도울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실리콘 밸리는 모험적 지식을 부양하는 훌륭한 체계를 창안했다. 벤처 캐 피털리스트가 그것이다. 벤처 캐피털리스트는 지식을 가진 창업지망생에 게 자금과 경영 노하우, 그리고 자신의 휴먼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벤처 기업가와 벤처 자본가가 파트너로 결합함으로써 위험과 성공의 결실이 상 호 분담된다. 벤처 캐피털리스트는 지금의 은행처럼 돈만 대는 게 아니다 . 한국의 재벌들이 벤처 자본을 미국에 투자했다 실패한 이유는, 돈 이외 에 필요한 노하우와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은 조직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지식을 가진 자본이 네트워킹되어야 한다. 그것 이 지식 경제의 사회적 하부구조다. 기계를 사람으로 대체한다는 것, 그 것은 삶의 방식, 곧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사람이 돈과 조직에 우선하는 자원이 되면 권력의 공간적 배분이 달라진 다. 사람은 공식 관계보다 비공식 관계에서 훨씬 높은 생산성을 갖는다. 휴먼 네트워크가 공식 조직보다 중요해지면 아이디어에 따라 필요한 인적 자원이 쉽게 결합한다. 휴먼 네트워크는 지식산업 시대의 기초 인프라다. 휴먼 네트워크는 일정 생활공간 안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형 성하는 과제는 국가의 몫이 아니라 지역의 몫이다. 지식산업이 부상하자 지역이 중요한 경제/권력 단위가 되고 있다. 정보화와 지역화가 얽혀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공간적 배분, 지역이 뜬다

지역은 지식산업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지 역 대학을 혁신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산학협동 체계를 갖춰야 한다. 자 본과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을 결합하여 벤처 시스템을 갖춰야 하고, 지역 산업·환경문제·사회문제 등을 정보기술에 의거해 혁신해 나가야 한다. 이미 글로벌 시장에 편입된 지식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자체를 세계 화해야 한다. 지역정부는 이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중앙정부나 해외기 업·해외정부와 협상할 정도로 자기 권력을 키워야 한다. 중앙정부나 대 기업에 의존해 가지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는 정보산업을 촉매로 지역혁신을 일으키는 민초 혁명 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 대학, 시민, 정부 등 여러 부문에서 배출되는데, 부문간 칸막이 구조를 협력 체계로 바꾸는 데 상당한 에너지 를 쏟는다. 부문간 협력은 단순 합계를 훨씬 넘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다. 그 시너지를 기초로 국가주의 시대를 넘어, 지역화-세계화의 큰 흐름 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40∼50대의 히피 세대들이라는 점은 시 사적이다. 그들은 권위적이면서도 배타적인 과거의 리더십을 대체하여 네 트워크 리더십을 창출하고 있다. 그 네트워크는 곧 지식산업의 기본 인프 라인 휴먼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이다. 패러다임의 핵 심 기둥을 찾아내고, 이를 바꾸는 일을 기획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박정 희 패러다임을 지탱하는 세 기둥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 국가와 재벌 의 주도 체계, 중앙집권적 조직과 문화다. 우리는 세 기둥을 바꾸는 작업 을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인프라를 투여하는 일로부터 추진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일은 새로운 기업과 공공자원을 크게 창출할 것이다.

김용호/ 미디어밸리 마스터플랜팀장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