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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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잊었는지 모른다. 기아사태는 속으로 곪아가고 있는 국가 경제의 겉 으로 드러난 환부였다. 이 환부를 치료하거나 도려내지 않은 결과 국가경 제의 병세는 천석고황으로 깊어갔다. 정부는 부도유예의 책임이 경영진에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외과적 수술(법정관리)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 다. 이를 위해 금융권 등 동원가능한 세력을 모두 동원했다. 하지만 영양 제 투입만으로 회복가능하다는 반대론자의 주장이 우세했다. 그러자 정부 는 아예 팔짱을 끼고 5개월여 동안 방치했다. 그 사이 경제는 만신창이가 됐고 자연스레 정부 의지대로 김선홍 회장은 밀려났다.
주주들이여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적 부도유예신청을 의미하는 IMF구제금융 요청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부와 언론은 한목소리다. “국민 모두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재 촉하고 “허리띠를 좀더 졸라맬 것”을 호소한다. 일부에선 일제 식민지 아래서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이라도 벌이자고 한다. ‘경제 주권의 포기 ’ 혹은 ‘경제적 식민지 상태’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지천에 널리는 형 편에서 백번 지당한 요청이고 호소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고 원칙이 있는 법. 국민을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내몰기에 앞서 반드시 이뤄지고 확인돼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책임소재에 대한 규명이다. (주)대한민국의 주주들이 새삼 기 아사태를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는 위기상황에서 책임론은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말한다. 또 일부 강심장들은 공동책임론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주)대한민국 의 최고경영자인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은 누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오늘의 사태는 그동안 되풀이돼 온 무책임의 국가경영에서 비롯됐다고 본다면 ‘선책임’은 아무리 강조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공동책임론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 가를 부실하게 경영했던 집단에 매번 경영을 맡겼던 게 바로 주주들이었 다. 그들은 재집권을 노리는 집단이 선거 때마다 내세우는 차별화의 얄팍 한 논리의 속셈을 잘 알면서 이를 수용했다. 사실 이 논리는 지역감정, 특정인에 대한 거부감, 기득권 보호라는 숨기고 싶은 감정과 계산을 둘러 댈 좋은 핑계였다. 그래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12·12, 5·17의 원죄 를 덮으려 전두환과의 차별화를, 김영삼 후보는 경제적 실정에 대한 책임 을 피하려, 그리고 현 집권세력의 적자들은 그동안 정치 경제적 실책을 비껴가려 노태우 혹은 김영삼과의 차별화를 내세웠다. 때문에 재집권세력 의 전임자 밟고서기 시늉은 선거판의 공리가 돼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인 가.
주주의 입장에서 그들이 떠안을 부채를 생각하면 책임론은 좀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대한민국 부실경영의 결과인 금융부실 50조원은 다름아닌 그들의 몫이다. 구제금융의 결과로 내년부터 나타날 대규모 실업사태는 물론 임금동결에 따른 실질임금 저하, 환율상승 등으로 인한 물가고, 세 율인상 등의 고통도 국민들 몫이다. 국가경제의 부도유예가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꽁무니를 빼거나 공 동책임론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이른바 국난극복운동을 확산시켜 책임론 을 소멸시키려 한다. 사사건건 책임론을 즐겼던 언론조차 왠지 이 파국적 사태 앞에서 책임론을 피한다.
5년 전 대한민국의 주주들은 주주총회(14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주)대한 민국의 대표이사로 김영삼씨를 선임했다. 그에게 국가경영의 책임과 권한 을 맡긴 것이다. 그에 따라 출범한 내각이 (주)대한민국의 경영진이었다. 부사장(총리)에 누구, 회계 책임자에 누구, 감사 책임자에 누구, 기획조 정실의 책임자에 누구, 사업 및 관리 분야별 책임자 따위가 그것이다. 한 국병을 치유하겠다고 나선 신한국당은 경영권 창출의 주역이었다. 일부에 선 ‘PK공화국’ 운운하며 경영진의 구성에 못마땅해 했지만 ‘문민경영 진’에 대한 높은 기대는 그런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무책임의 표본일 뿐이다. 공동책임론을 들고나온 김 대통령은 은근히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은 부실이 덧난 것 뿐 이라며 책임을 떠넘긴다. 국가경영의 기본 틀로 ‘당정협의’를 앞세웠던 얼마전 신한국당 총재는 “지금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은 집권당이 아니며 대통령도 우리 당 소속이 아니다. 우리와는 관계없다”고 무책임 을 강변한다. 김 대통령에게 간택됐던 경기지사 국민신당의 후보 역시 마 찬가지다.
정보는 없고 수사만 있는 안기부
이 나라 최고경영진들이 그러했으니 나머지 국가기관장들이야 오죽할까. 국가경영의 기획조정을 책임진 안기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 확대하는 데 만 혈안이다. 정보는 없고 수사만 있다는 비아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 다. 실제로 최근 그들이 제손으로 간첩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 “나는 간첩이로소이다”라며 돌아다니던 부부간첩도 신고에 의해 잡혔 다. 그 대신 고첩 고영복씨에게는 36년 동안 각종 안기부 및 국가의 주요 프로젝트를 맡겼다. 평통자문위원 오익제씨에 대해서도 그가 밀입북한 뒤 에야 간첩혐의를 씌웠다. 무능과 무책임의 실토인지 그들은 북한의 고첩 1만여명과 지원세력 3만명이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속의 실수로 기산 전투에서 패배한 공명은 그토록 아끼던 마속의 목을 잘랐다. 눈앞에는 위의 30만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공명은 그러나 ‘읍참 마속’만으로 기강이 바로서리라 믿지 않았다. 그는 퇴각하자마자 승상직 을 내놓았다.
국가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을 하고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장본인들에게 ‘ 공명 일화’는 한낱 공염불일 것이다. 이제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국민 들이 나서는 도리밖에 없다. 어떻게 나서야 하는가. 그것은 본인들이 잘 알 것이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