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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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YWCA가 주최한 외환 고갈 해결 캠페인. 경제신탁통치라는 굴욕을 기회로 삼기 위해서라도 국민 스스로가 주권자로 나서야 한다.)
조원희/ 국민대 경제학과 부교수
슬프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고 나라의 주권을 상실했던 기억이 아 직도 생생한데 우리의 경제주권의 주요부분을 남에게 넘겨주게 되다니. 대기업의 연쇄부도, 금융권의 부실채권 누적, 정부의 미온적 대응이 동남 아 금융혼란과 맞물리면서 초유의 금융공황 상황으로 발전하자 마침내 정 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 람은 재경원이 보기 싫던 차에 마침 잘됐다고 말한다. 마치 구한말 민비 가 보기 싫고 대원군이 보기 싫던 차에 일본, 청나라가 들어오니 좋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경제파탄 막기위해 무장해제 당하는 꼴
IMF는 겉으로는 한국경제의 과잉 투자부문을 구조조정한다고 하면서 실은 세계경제가 당면한 여러 부문, 특히 전자, 자동차, 철강 등의 과잉투자 문제를 한국기업의 잘못으로 몰아 대규모의 축소조정을 단행하라는 압력 을 행사할 것이다. 또한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고 공정 경쟁환경을 조성한 다는 명분으로 외국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라고 하면서 이권을 챙 길 것이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이 저들 국 가 자본이 들어와 마음대로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이지, 어떤 견실하고 내 적으로 균형잡히고, 그래서 생산성이 발휘되는 하나의 국민경제가 아니다 .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라는 이상이 반드시 악일 필요는 없지만, 기형적으로 왜곡된 경제를 정상으로 되돌릴 여유도 없이 구조조 정을 하고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중한 자산을 쓰레기수집상에게 강매당하고 이어 무장해제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쇼크에 빠진 경제 의 파탄을 막아주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그들은 마음씨 좋은 사마리안 이 아니고 잇속 바른 장사꾼들(세계의 다국적기업 및 금융자본)을 대변할 뿐이다. 지금도 재경원 장관 등 정부는 IMF가 그다지 까다로운 요구는 하 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섞인 주장을 하고 있다. 부도에 빠진 기업에 협조 융자를 하면서 그냥 빌려주는 경우를 보았는가? 지금의 구제금융결정은 부도직전에 있는 국가경제 자체의 협조융자요청이고 여기에는 당연히 강 한 조건이 붙게 마련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리해고 당하여 길거리에 나앉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쓰 러진다 해도 그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을 것이다. 집권정치세력, 재벌의 최고경영권자, 은행장 등이 누이좋고 매부좋고 해서 방만하게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금융의 부실화는 오직 열심히 일해온 은행원들이 직장을 잃음으로써 해결하는 셈이 된다. 결국 일부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이 파티 를 즐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비용이 힘없는 자들이 부담할 몫이 되고 마는 것이다.
IMF의 전통적 처방책은 재정확대, 세금감면, 통화증발에 의한 해결책을 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IMF는 전 국민에게 슬슬 부담을 전가시키면 서 문제의 근원을 건드리지 않는, 통상 한국 정부가 취했던 방식을 용인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가장 직접적이고 비정한 방법으로 취급 하여 거품을 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요한 경제적 이권을 외 국자본에 내놓는 것이 될 것이다. 어차피 한국의 무능한 경영자들은 문제 가 있으니 우리가 들어와 사업을 하겠다는 ‘점령자’의 논리가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양식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한국재벌의 행태, 재벌 등 기득권 세력 과 밀월관계를 지속해온 관료, 정치인, 언론을 비판해 왔고, 구조적 문제 의 심각성을 거듭 경고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줄곧 “지금까지도 잘해 왔고, 숱한 위기도 잘 넘겼는데 무슨 말이냐”고 일축해 왔다. 중소기업 을 위축시키고, 그리하여 경제의 생산성 기반은 정체를 면치 못하는 가운 데, 그러면서도 자원을 독점한 재벌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대형투자로 자 기들끼리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세계의 유수 대기업들로부터 시장질서 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지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영자율시장경제 를 금과옥조처럼 암송하는 재경원 등 일부 관료들의 주장은 결국, 개혁을 회피하면서 시장에서 마음대로 활동하려는 대기업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 었던 셈이다. 최근의 금융감독체제 개편안에서 관치금융의 탈피라는 금융 개혁의 일차적 과제에는 미온적인 채 재경원의 금융감독권을 움켜쥐는 데 만 주로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집단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높이 쳐드 는 시장주의에 가장 반하는 개혁대상집단이다.
개혁대상 1호는 재경원
언제나 그러하듯 결국 고통은 국민대중의 몫이다. 그런 만큼 문제의 근원 과 진정한 해결방향을 그 어떤 높은 사람도 아니고 국민 스스로가 제시해 야 한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구조에 편승하여 돈을 벌어보겠다고 생각하 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파티장에 벼락이 떨어졌는데도 그것을 기분을 돋우는 폭죽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또 문제가 꼬이면 “한국사람 은 강제로 밀어붙여야 움직인다”며 독재적 방식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진 정으로 책임을 져야할 일부집단을 보호하는 역할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 는 셈이다. 지금은 내 작은 이익을 넘어 전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작은 이익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이해관계를 가진 기득권 세력의 궤변을 넘어선 개혁방향이 도 출될 수 있다. 경제주권을 찾기 위한 제2의 구국운동이 필요한 때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