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를 달리는 ‘파리의 택시’

(사진/<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한때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유일한 꼬레 출신 택시운전사”였다. 그 ' 꼬레'는 그를 삼중의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79년 해외지사원으로 파리에 머물던 그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전사라는 까닭으로 고국에 돌 아올 수 없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노르? 우 쉬드?(북쪽? 남 쪽?)”라는 동료들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던 사람. 여권의 여행 목적지란 에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라고 박고 다녀야 했던 망명객. 홍세화(5 0)씨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창작과비평사 펴냄)는 그 생존의 조각들과 회상을 엮어낸 기록으로 1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 책에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리고’라는 발문을 쓴 이는 마당극 연 출가 임진택(47·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씨였다. 홍씨의 경기고 3년 후배이자 서울대 외교학과 동기였던 임씨는 ’97세계마당극큰잔치 관계로 파리에 갔을 때, 선배의 극적인 삶을 연극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 황규덕 감독이 준비하던 <나는…>의 영화 작업이 흐지부지해졌던 참이 라 깔끔한 성격의 홍씨가 거절하면 어쩌나 속으론 걱정했다.

임진택씨가 ‘현대판 햄릿’으로 연출

“연극을 하자, 연극을. 원래 연극을 했었잖아.” 책에 나오는 한 구절처 럼, 홍씨는 쾌히 임씨의 구상에 동의했다.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임 씨 등과 함께 김지하 시인의 <구리 이순신> 조연출을 했던 홍씨는 이제 연극보다 더 극적인 자신의 삶을 무대에 던져 넣는다.

극단 길라잡이(대표 양정순)가 12월12일부터 98년 1월15일까지 서울 대학 로 소극장 아리랑에서 공연하는 <나는…>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주인공 홍세화 역의 이현우(34·순천향대 영문과 교수)씨는 홍씨의 경기 고 16년 후배다. 경기고 연극반과 고려대극회에서 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이씨는 평소 홍 선배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참이라 연출가 임진 택씨의 제의를 덥석 받아들였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학자답게 홍씨를 “현대판 햄릿”이라고 부른 그는 “<나는…>이 현대 지식인의 실존적 위 기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보고서”라고 평했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는 그의 고백이 70, 80년대를 그와 같은 생각으로 힘겹게 살아왔던 사람 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사진/홍세화씨의 힘겨운 삶을 무대에 옮긴 연극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연습 모습. 임진택(아래 맨 오른쪽)씨가 지켜보고 있다. )

“홍 선배가 피맺힌 가슴으로 토해내는 ‘똘레랑스’의 철학에 공감합니 다. 비타협보다는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는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 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하자는 ‘똘레랑 스’ 정신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자 자유에 대한 찬가입니다.” 이씨는 관 객들에게 이 ‘똘레랑스’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홍씨의 부인 박일선씨로 분하는 이화원(39·상명대 연극학과 교수)씨도 이화여대 극회 역사에 명배우로 기억되는 연극쟁이다. 대학 시절, 임진택 씨와 작업했던 연으로 오랫동안 떠나 있던 무대로 돌아온 이씨는 “임씨 가 ‘선이 누님’으로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하는 마담 홍의 활달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잘 소화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의 귀국은 ‘똘레랑스’ 정신의 출발”

보름여 앞으로 다가온 공연을 준비하는 삼선교 연습실에는 홍씨가 꾸려 보내준 각종 사진 자료와 슬라이드, 비디오 등이 널려 있었다. 지난 11월 1일 <나는…>의 일본어판(미스즈 서방) 출판기념회 때 도쿄에서 홍씨를 만났던 임진택씨는 “세화형과 작품 이야기를 많이 했다. 돌아오는 문제 도 언뜻 내비쳤다. 수현, 용빈 두 아이들이 프랑스 국적을 얻고 나면 형 도 귀국하겠다는 뜻을 굳힌 것 같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에 공동 주최 자로 나선 참여연대(사무처장 박원순) 역시 홍씨의 귀국 문제에 힘을 보 탤 계획이다.

“내년 1월쯤엔 세화형도 그렇게 피멍 들도록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우리 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 뮤 지컬의 요소를 삽입하는 등 ‘가볍게, 가볍게’ 극을 만들었다는 임진택 씨는 이 연극이 홍세화씨의 귀국에 디딤돌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02-766-1518.

정재숙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