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긴데도 눈물과 웃음을 만들어 내는 멜로드라마의 공 식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다. 하지만 그 양상은 다양하다. 영화사를 들춰 보면, 더글라스 서크나 파스빈더와 같은 작가는 과잉의 멜로드라마를 만 들어 냈는가 하면 우리에게는 <미워도 다시 한 번>과 같은 최루성 멜로드 라마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사회맥락과 어우러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반 영이다.

<편지>를 들여다보면 우선 초반부에서 정인과 환유가 만나 만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과장되고, 유치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후반부에 남편 환유가 죽음을 맞이하고, 정인이 다시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을 지켜 보는 포석으로 볼 때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든지,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 는 만남의 장면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너무나 상투적인 이미지 로 시작해 헛웃음을 만들다 어느새 눈물의 파티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다.

영화 전체를 통한 가장 큰 미덕은 촌스러움이다. 영화 자체가 촌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가 ‘편지’라는 소재에서 엿볼 수 있듯 복고주 의적이고 서정적이다. 그것은 찌든 도시의 일상에서 꿈꾸던 삶과 일치한 다. 전원에서 그림같은 집을 짓고, 나무와 꽃을 가꾸며 사는 꿈.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읽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꿈. 그것이 <편 지>가 지닌 사회적 반영이다. 폭력물과 이미지의 과잉이 난무하는 시대에 <편지>가 우리의 마음에 쌓이는 매력은 바로 이점에 있다.

또한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일정 정도 수용하면서도, 교묘하게 상투성을 피해나감으로써 진부함에 머물지 않는다. 환유가 뇌종양으로 죽 고 나서 단순히 감정의 소비로 끝나기 쉬운 결미 부분을 ‘죽은 남편의 편지’가 정인에게 도착하게 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 는 대목이 그러하다. 여기서부터 두 인물간의 사랑이 내세의 사랑으로 확 장된다. 그것은 <사랑과 영혼>과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 기다림의 한국적 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다.

정서의 대변이라는 측면은 ‘나무로 만든 집’을 통해 아기자기한 일상을 늘어놓는 화술에서 볼 수 있듯 배창호, 이명세 감독을 잇는 한국적인 멜 로드라마의 전통을 엿보게 한다. 때로는 상투적인 요소가 눈에 거슬리게 도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감독의 절제된 연출력과 올해 한국영화부 문 시나리오상감인 이야기 전개가 놀랍도록 깔끔하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더 치밀한 구성력과 영화 형식에 대한 실험정신이다. 하지만 < 접속>에 이어 멜로의 맥이 이어지면서 한국 영화의 한해를 마감한다는 것 이 무척이나 반갑다.

이상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