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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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올 레이디 두 잇')
서울 남대문 시장 안에 에로틱영화의 한 거점이 떴다. 옷가게와 야채상과 어물전과 고깃간을 지나 남대문로쪽으로 빠지는 길 마지막쯤에 뉴남대문 극장(극장장 정영수)이 있고, 그곳에서 지금 ‘에로틱 영화축제’가 열리 고 있다.
시장과 극장, 두 장이 포개지는 지점에 피어난 ‘에로’의 냄새는 미묘하 다. 생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파의 시장통을 지나 4층 건물을 오르면 호젓한 극장 입구가 나타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벽 하나 저 바깥의 인 습과 제도가 금기시하는 성애 영화를 즐긴다.
에로영화를 당당하게 즐길 수 없는가
종합영상주간지 <씨네21>과 뉴남대문극장 기획실이 손잡고 만든 ‘에로영 화 보기, 당당하게 보기’는 11월8일 4주 일정으로 시작됐다. 한주에 두 편씩,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된 8편의 에로티시즘 영화를 네 가지 시 선으로 갈라 놓았다. 첫째주 ‘에로티시즘과 정치’에는 성 또는 성욕이 품고 있는 권력의 본질을 얘기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퍼블릭 우먼>과 릴리아니 카바니의 <비엔나호텔의 야간배달부>, 둘째주 ‘비정상성의 영 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인간 본성의 온갖 성적 기행들을 뒤섞은 비가스 루나의 <하몽 하몽>과 제라르 치코리티의 <파리 프랑스>를 선보였 다.
셋째주(11월22∼28일)의 주제는 ‘에로티시즘과 포르노’. 이탈리아 에로 영화계의 대표 감독인 틴토 브라스의 <올 레이디 두 잇>과 <8요일의 여자 >는 영원한 성적 본능인 ‘훔쳐보기’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마지막 주(29일∼12월5일)는 ‘에로티시즘의 고전’인 베르나르도 베르톨 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쥐스트 자캥의 <끌로드 부인>이 장식 할 예정. 이 주제 가르기는 ‘에로=포르노’의 해묵은 선입견을 깨보려는 교육적이면서도 의도적인 기획자들의 뜻을 담고 있다.
(사진/"에로영화를 당당하게 즐겨라." 에로영화 전용관으로 거듭난 뉴남대문극장의 영화 포스터들. )
이 자리는 제목 그대로 ‘당당하게’ 성애영화를 보자는 ‘운동 현장’이 다. 몰래 보지 말고, 잘린 필름 보지 말자는 주최자들의 구호는 ‘등급외 전용관 설립 허가 촉진을 위한 대한민국 최초의 에로틱영화축제’라는 긴 부제로 표현됐다.
“에로틱영화는 성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한 장르입니다. 성을 안방으로만 은밀하게 끌고 들어가도록 한 16㎜ 비디오 작업보다는 공개된 장소에서 떳떳하게 볼 수 있어 더 건강하지요. 청소년들이 접근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조현진(27·뉴남대문극장 기획실)씨는 에로영화 전용관이나 등급외 전용관 설립이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축제 기간의 반을 치르고 3주째로 접어든 현재, ‘에로틱영화제’는 일단 성공 평점을 받았다. 위치의 불리함 때문에 시내 중심가 개봉관과 똑같은 영화를 걸어도 파리만 날리던 건 옛말이 됐다. 3백20석 좌석에 하루 평균 2백50명이 들어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시장 상인들 뿐 아니라 근처 사 무실로부터 찾아오는 단골 관객들이 생겨난 것도 반갑다. 사우나에서 잠 깐 눈을 붙이는 대신 이 영화관을 즐기는 샐러리맨들의 정서는 오히려 씩 씩해 보인다.
젊은 관객들 물결에 단골도 생겨
뉴남대문이 ‘에로틱영화 전용관’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큰 소득. 이제까지 7백여명이 등급외 전용관 설립 서명운동에 동참했고, 10%에도 못 미치던 20대 젊은 관객들의 비율이 40% 선으로 올라갔다. 의식있는 미 래의 고객 확보 전선에 파란 불이 켜진 것이다.
개막 전날인 11월7일 밤 8시부터 열렸던 심야 시사회는 이 영화축제의 성 격을 잘 보여주는 강연회와 토론회가 화제를 뿌렸다. 전 연세대 교수인 마광수 교수가 2백여명의 열성 팬과 만나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 인 틀을 이야기했다. 이날, 마 교수는 “성은 죄가 아니다” “<빨간 마 후라> 찍은 청소년 애들은 순결하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합방한 게 열다 섯살 때 아닌가” 같은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해서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지와 서명운동 지면에는 이제 까지 국가 기관의 일방적인 억압에 눌려있던 영화 감상 권리를 되찾으려 는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볼 권리,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잘린 필름은 더이상 보기 싫다.”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길.”
(사진/'8요일의 여자'
)
극장 관리를 맡고 있는 김정숙(51)씨는 “낯익은 얼굴이 늘어나는 것은 기쁘지만 가끔 두편 다 보고 나와서 하나도 안 야하다며 입장료 물어내라 고 할 때 난처하다”고 말했다. ‘야함’에 대한 이 사회의 잣대 또한 ‘ 미친 놈 널뛰기’인 모양이다.
뉴남대문극장은 영화수입사인 유성필름(대표 김용로)이 3년 동안 임대한 ‘B급 문화공간’이다. 말하자면 대기업들이 뛰어들며 늘어나고 있는 ‘ 백화점식 극장 공간’에 대항해 역으로 치고 나온 대안공간인 셈이다.
야하지도 않네? 국내 에로영화도 상영
“극장은 관객을 위한 놀이터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 조현진씨는 “IMF 로부터 구제금융까지 받아야 하는 우리나라를 애도하는 ‘대한민국 부도 기념 콘서트’ 같은 의미있는 놀이판을 벌이는 것, 공포영화축제와 컬트 영화축제 등 마니아들을 위한 특별행사를 여는 것, 잘만 킹 같은 에로영 화의 대가들을 불러 얘기판을 벌이는 것도 우리 극장의 목표”라고 말했 다. “극장은 쓸고 닦지 않으면 바로 쓰레기장이 돼버리는 화장실 같은 존재”라고 정의한 조씨는 앞으로 뉴남대문같이 전문 극장들이 많이 생겨 나 서로 즐거운 경쟁을 벌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뉴남대문극장은 앞으로 한국 에로영화 걸작들을 발굴해 먼지를 털어 거는 등 내년 상반기까지 에로영화 전용관으로서의 성격을 굳힐 계획이다. 문 의: 02-775-2915.
정재숙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