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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추행범 비호 중단하라

‘인면수심을 지닌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수많은 아이들을 위한 이 시대의 수호천사인가, 아니면 대중의 막연한 불안감에 영합해 타인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사악한 정치인인가.’ 오스 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상원의원 프랑카 아리나를 둘러싸고 지난 두달여 동안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다.


지도층도 아동 성추행 공범 주장 파문

논쟁은 발단은 지난 9월16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봅 카 총리가 어린이 성 추행(Pedophile) 세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특히 “조직적 성추행의 예 방차원에서 성추행 전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관리체 계를 마련해줄 것”을 하워드 연방 총리에게 건의하면서 비롯되었다. 카 총리가 어린이 성추행예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을 때 주 상 원의원인 프랑카 아리나는 “성추행 조직을 비호하는 세력의 수괴가 카 총리”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시작했다.

“노동당 당수인 카 총리를 비롯해 제임스 우드 왕립위원장 등이 아동 성 추행 혐의나 전력이 있는 정계 및 법조계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보호·은 폐하고 있다”는 아리나의 주장은 정계에 일대 회오리를 불러일으켰다. 노동당 의원인 아리나는 “카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피터 콜린스 연립야 당 당수와 수많은 법조계 인사들이 이런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면서 사실상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지도층 전부를 ‘아동 성추행’이 라는 범죄의 주범·공범의 테두리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는 “사회에 미칠 충격을 고려해 거명하지는 않겠지만 고위층 인사들의 상당수가 아동 성추행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며 구체적인 고위층 아동 성추행범의 명단은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의 발언은 당연히 정치권을 중심으로 물증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불러일 으켰다.

특히 아동 성추행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선점하려고 노력해온 주 총리 봅 카는 예기치 못한 ‘아리나 파문’으로 자신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이 일 단은 대중으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 다.

카 총리는 ‘거짓말을 팔러 돌아다니는 행상’ ‘악명 떨치기를 원하는 여자’ ‘장관직에서 밀려난 분풀이로 동료를 중상모략하는 정치인’ 등 의 원색적인 표현까지 쓰며 아리나의 정치적 매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 다. 아리나의 돌출행동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일한 노동당 주 정부로 일관된 지도력을 과시하고 있는 카 총리에 대한 최대의 정치적 도전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태생인 프랑카 아리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여성의원으로서 최근 몇년간 아동 성추행 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제도적 장치 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민자 출신인 그 는 앵글로 색슨계 이외의 유럽계 공동체 사이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상 당한 명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파문에 대해서 여론은 약 10% 정도만이 그녀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 으로 조사돼 아리나 발언의 진실성은 대중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민자 공동체나 아동 성추행 방지 운동단체들 사이에서는 그가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 10월 초 시드니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아동보호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 아리나는 열화 같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이들을 위한 십자군 ’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다. 기독교 원리당이 주최한 이 집회에서 그는 “ 의회나 법원에 아동 성추행자가 없다는 믿음은 마치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천진난만한 생각과 다름이 없다”면서 “나의 주장은 결코 허 구가 아니며 때가 되면 반드시 진실로 드러날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조사위원회 “아리나 주장은 거짓말”

정치권도 그의 발언의 무게 때문에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정치권은 여 야 합의로 원로 법조인 존 나이더를 중심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아리 나 의원이 제출한 증빙자료와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두달 가량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11월7일 발표된 나이더 위원회의 최종보고서는 예상대로 ‘프랑카 아리나의 주장은 총체적인 거짓말’이라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아리나의 주장은 유권자를 대표하는 의원이 준수해야 할 법적 권리와 의무에 대한 방기일 뿐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함 으로써 사회의 갈등과 분열만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리나 의원은 나이더 보고서의 결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오로지 어린이 복지와 어린이들을 탐욕에 찌든 야수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만 관심이 있다”는 최초의 주장을 거듭할 뿐이었다. 때문에 아리나 파문 은 한차례 터무니없는 정치적 쇼로 끝나는 것만 같았다.

나이더 보고서는 아리나의 의원직 제명을 추진하던 정치권의 시도를 더욱 가속화시켜 지난 11일 주의회는 아리나 의원 제명안을 상정하기에 이르렀 다. 이날 오전 아리나에게 주어진 70분간의 의회연설 시간은 유죄판결만 을 기다리는 피의자의 최후 진술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연설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몇 시간 뒤 의원직에서 쫓겨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리나 제명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던 연립야당의 국민당 계 열 의원들이 대거 당론에서 이탈해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예상을 뒤엎고 아리나 제명안은 부결되었다. 카 총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피터 콜린스 야 당 당수의 불안전한 지도력 때문이었다. 또 아리나가 의원직을 계속 유지 해 노동당을 분열시키는 것이 결과적으로 연립야당의 반사이익으로 이어 진다는 국민당 의원들의 정세판단이 ‘반란’의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아리나는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의원 자격을 유지한 채 의회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의원직 상실을 가까스로 모면한 아리나 의원은 그때까지의 수세에서 벗어 나 공세적인 태도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퀸즐랜드주에 서도 아동 성추행 조직을 비호하는 거대한 음모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온 로레인 버드 의원과 공동보조를 취하기 시작했다. 아리나는 로레인 버드 와 함께 아동 성추행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 항상 경찰에 자신들의 행방을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법률안을 주 의회에 상정하는 등 활동에 활 기를 더하고 있다. 또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상원의원 빌 헤프먼 등 아리나 의 주장을 지지하는 정치인도 공개적으로 논쟁대열에 합류했다.

이와 함께 아리나가 제출한 증빙자료에 대해 피터 라이언 뉴사우스웨일스 경찰청장이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밝히는 등 아리나 파문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듯하다.

진실 여부를 떠나 몇달째 이어지는 ‘아리나 파문’은 최근 민감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아동 성추행 문제에 대해 높아가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 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물론 불우아동을 위한 사회보장 시설에서조차 아동 성추행이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 는 현실 속에서 대중들은 확증은 없으나 아리나의 주장이 갖는 개연성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권을 비롯한 정부차원에서 이 문제해결을 위 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점도 파문을 더욱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성추행 국가차원의 대책 마련 계기

아동문제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아리나 파문에 대해 ‘마녀사냥’이라도 하듯 그를 정치권에서 쫓아내는 데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아동 성학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리나의 주장은 정치권에는 일대 파문을 던지며 오스트레일 리아에서 1백년 동안 2번밖에 시도되지 않았던 의원직 제명안이라는 파행 까지 몰고 왔다. 그러나 ‘아리나 파문’은 발언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아동 성추행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국가차원에서 대책을 마련 해야 한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 다.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04일 제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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