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인도네시아의 국모 ‘카르티니’

라멘 아젱 카르티니. 우리에겐 낯설기만 한 이 이름의 주인공은 인도네시 아에서 국모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선각자, 여성 운동의 선구자, 교육운동가로서 그는 인도네시아를 위해 삶을 바친 여러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을 받는다. 카르티니는 25년이란 아주 짧은 삶 을 살았다. 그런 그가 인도네시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카르티니는 1879년 자바 북쪽의 작은 섬 재파라에서 태어났다. 당시 인도 네시아는 2백80여년에 걸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다. 수마트 라 북부 아체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몇년째 네덜란드와 싸우는 중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은 민족이란 개념조차 자각하지 못하던 때 였다. 인도네시아란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식 이름은 네덜란 드 동인도,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이 태어난 건 1929년의 일이다.

카르티니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가 키워낸 식민지 출신 행정관료였다. 이런 행정관료를 프리야이라고 부른다.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도 프 리야이 출신이다. 카르티니는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어했다. 네덜 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교육, 특히 여성에 대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프리야이 자녀들을 위한 여학교를 세웠다. 1902년 그의 나이 23세 때다. 이 학교는 서구식 근대교육을 하되 학생들 에게 향토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이듬해 카르티니는 변방의 도지사 조하드닝라트와 결혼해 첫아들을 낳고 는 출산후유증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런데 7년 뒤 카르티니가 죽기 전 친구와 동료에게 보낸 편지 1백4통을 모은 서한집 <어둠에서 빛 으로>가 출간되면서 카르티니는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자루 펜에 의지해 근대화에 대한 자신의 꿈을 그려놓았다. 공부 를 계속하겠다는 꿈, 학교를 세우겠다는 꿈, 서민과 사귀고 함께 생활하 는 꿈, 자신이 갇혀 있는 공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꿈…. 그런가 하면 인도 네시아의 풍요한 자연을 한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그에 대한 사랑을 털 어놨다.

편지에 쏟아놓은 카르티니의 사랑과 아픔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시 간이 흐르면서 카르티니는 민족의 꿈의 근원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카 르티니를 빌려 민족의 희망과 자신의 미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 서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서유럽에게 19세기는 서유럽 진출의 시대다. 식민지를 찾아 앞다퉈 동방 진출에 나선 이들의 움직임을 우리는 제국주의라고 부른다. 아시아·아프 리카에는 외세의 침략을 받는 가운데 민족의식이 뻗어나는 시기다. 인도 네시아는 수많은 점들로 이뤄져 민족이란 공동체 개념이 거의 없다가 침 략을 받으면서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자각하게 됐다. 카르티니는 뻗어 나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순수하고 뜨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짧게 살다간 탓에 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그의 뜻을 이어받 은 카르티니 학교는 곳곳으로 퍼져나가 여성교육의 씨를 뿌렸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