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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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다.
술로 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 안 된다. 앞으로 두어달은 더 참아야 한다. 만약 인내하지 못한다면 어떤 무서운 대가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6개월째 먹어왔던 약 효과를 도루묵으로 만들 수도 없다. 서울 청진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삼덕사’를 운영하는 이상원(36)씨. 그 는 2년 전부터 ‘공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아왔다. 불안감으로 버스 조차 탈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벌떡벌떡 뛰면서 숨이 막 히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겁니다. 1년6개월 동안이나 집 밖엘 나가지 못했어요.” 다행히 병세는 회복되고 있다. 그는 요즘 얼굴 의 웃음도 되찾았다.
‘삼덕사’는 기념품과 상패, 명함, 판촉물 따위를 주문생산하는 조그마 한 가게다. 두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70년대부터 이어져온 아버지의 가업 이다. 그도 이곳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82년 군 제대와 함께 시작했으니 벌써 16년째다. “공로패 따위의 상패가 주력상품이죠. 구청 등의 관공서 일감이 가장 많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는 요즘은 성수기에 속한다. 대신 여름철엔 거의 일이 없단다.
<한겨레21>은 3개월 전부터 읽고 있다. 술로 못 푸는 스트레스를 시사주 간지를 읽으며 조금씩 날려버리고 있다. “정치기사를 가장 즐겨 읽습니 다. 화끈한 비판에 갈증이 씻겨요.” 그러나 정치에 대한 환멸은 갈수록 심해진다. 같은 당 안에서조차 물어뜯고 싸우는 걸 보면 침을 뱉고 싶어 진다. “정치 잘못해서 만들어진 정신병을 기사화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진료 때문에 신경정신과에 가보면 저와 비슷한 증세를 가진 이들이 의외 로 많아요. 명퇴니 부도니 해서 충격받아서 오는 사람들도 꽤 됩니다.” 그는 아직 미혼이다. 결혼에 별로 마음이 안 동해 20대 후반을 그냥 넘겼 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혼사가 쉽지 않다는 걸 실감한다. 얼마 전에 겪은 아픈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선을 보기도 전에 퇴짜를 맞았던 것이 다. 미리 그의 얼굴을 본 상대쪽 어머니는 처음엔 ‘합격 판정’을 내렸 다. 그러나 며칠 있다가 못하겠다는 거였다. 이유는 그의 고졸학력. 아흔 살의 할머니와 노부모를 모두 모셔야 하는 2대 독자라는 점도 탐탁지 않 게 보였을 거라고 그는 짐작하고 있다.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자신과 맞는 배필이 언젠가는 운명적으로 나타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남편을 휘어잡을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 어요. 저의 어머니처럼요. 대단히 화통하시고 깐깐한 성격이시거든요.” 그는 결혼 뒤 부부가 함께 레스토랑을 차렸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 “단돈 1백원을 벌더라도 여러사람과 상대하면서 살고 싶어요.” 직장 생활을 한번도 안 해 봤기에 그 바람은 더욱 절실하단다.
최근엔 죽마고우까지 암으로 잃어 외로움이 더하다는 이상원씨. 그의 빈 가슴은 언제쯤 채워질까. <한겨레21>이 당분간 애인 노릇을 해야 할 듯하 다.
고경태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