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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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호앙 미로, <새(태양)>.)
풍성한 가을. 미술동네도 결실로 가득하다. 9∼11월은 화랑가 전시가 일 년 중 절정에 달하는 시기다. 여름 내내 작업에 힘써 온 작가들이 회심의 신작들을 집중적으로 내놓기 때문이다. 특히 올 가을은 제2회 광주비엔날 레(9월1일∼11월27일)도 열려 세계미술의 다양한 흐름까지 접할 수 있는 호기다. 그렇지만 미술시장의 지독한 불황과 대선정국의 여파로 중견작가 들이 전시를 미루고 있고 의욕적인 기획전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신예들 또한 유행을 좇거나 친목성격의 단체전 참가로 그치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미술평론가 조광석(43)씨는 “전시회수는 예년 수준을 유지하 고 있지만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실험적이거나 파격적인 작품이 드물다. 불경기와 어지러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견이나 신인작가 가릴 것 없이 쉽게쉽게 작업하려는 풍토가 고착되는 추세”라고 진단한다.
‘전환의 공간전’ 탄탄한 기획 돋보여
그나마 두드러진 흐름은 해외거장들의 작품전 바람이다. 호암미술관의 해 외수집미술품을 선보이는 ‘전환의 공간전’(12월28일까지·호암갤러리· 02-771-2381)과 스페인 초현실주의 거장 ‘호앙 미로전’(12월21일까지· 금호미술관·02-720-5114), ‘피카소 미공개 드로잉전’(한국경제신문사 신사옥갤러리·02-360-4547∼8) 등의 대형전시가 잇따라 마련되고 있다. 규모나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구조추상화의 대가인 ‘고트프리드 호네거전 ’(11월6일∼12월6일·가인화랑·02-518-3631∼2)과 영국의 나무조각가 ‘데이비드 나쉬전’(11월21일까지·표화랑·02-543-7337)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 가운데 바탕이 가장 탄탄한 전시로는 ‘전환의 공간전’을 들 수 있다 . 기획방향을 2차대전 직후 서구현대미술의 전환과 전개과정으로 틀지은 점이 돋보인다. 전시를 1부 ‘모더니즘의 전개와 종언’, 2부 ‘포스트모 더니즘’으로 나눠 모더니즘 미술의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1부에서는 추상표현주의 대가 아쉴 고르키, 윌리엄 드 쿠 닝 등의 미니멀 조각, 회화 등이 선보이며 2부는 요셉 보이스와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을 중심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 제니 홀저 등의 신표현주의·전자매체 작가들까지 망라돼 있다. 스텔라와 로버트 라 이만, 리히터 등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이 주류를 형성한 시대의 몇 작가 들을 전환기 미술의 선구자들로 설정한 것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다.
바르셀로나 호앙 미로재단 소장품이 나온 ‘호앙 미로전’은 45년 이후 만든 브론즈 조각상과 그림, 판화 등 1백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해와 달, 날짐승, 인간 등이 두루 얽힌 기이한 조각상과 환상적 톤의 반추상 그림 들이 눈을 끈다. 그러나 참신함은 떨어진다.
‘피카소…’전은 피카소가 죽기 전 비서에게 선물했다가 93년 발견된 미 공개 소묘작품 1백6점을 내놓았다. 관능적인 여체누드상이 주류를 이루는 드로잉들은 성적 욕망에 탐닉했던 그의 인간적 속내를 들여다 보게 하지 만 미술사적 가치는 높지 않다는 평이다. 기획전으로는 그로리치화랑(02- 720-5907)의 ‘아프리카 미술전’(11월1∼11월15일)과 스페이스사디(02- 3434-0304)의 ‘끈’전(11월24일까지)이 관심거리다.
아프리카 미술전에는 나이지리아, 가나, 말리 등에 사는 아프리카 원시부 족의 가면과 생활용구, 조각상 30여점이 선보인다. 피카소, 블라맹크, 브 랑쿠시 등 금세기 초 현대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아프리카 조각의 실체를 살펴본다는 취지다. 특히 제례가면과 길쭉한 제기형태의 물품들은 거장들의 작품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어 색다른 감상의 맛을 느끼게 한다.
‘끈’전은 구본창, 박병규, 임미나씨 등 30∼40대 중견사진가 7명의 작 품모음전이다. 사진 속의 사물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숨겨놓 는 사진가의 특성을 ‘끈’이란 화두로 묶고 한이나 고독, 죽음 따위에 대한 감정 등을 상자 조형물이나 소외계층의 모습, 해변의 갈매기상 등을 통해 암시적으로 전달한다.
아프리카 미술에서 색다른 미술 체험
(사진/아프리카미술·콩고 바테카 부족. )
그 밖의 주요 개인전으로는 이종빈전(11월15일까지 금산갤러리·02-735-6 317∼8), 홍명섭전(11월28일까지 경주선재미술관·02-568-0630∼1), 방혜 자 전(11월5일까지 갤러리 현대·02-734-8215), 양만기전(31일까지 갤러 리 상·02-730-0030), 김민자전(11월4일까지·가람화랑·02-732-6170), 홍황기전(11월4일까지 21세기화랑·02-735-4805), 서동화전(11월19일까지 포스코갤러리·02-3457-1665), 김창영전(31일까지·박영덕화랑·02-544-8 481∼2), 김수연전(11월9일까지 사진이 있는 마당·02-720-9955) 등을 꼽 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이종빈전은 그가 관념적인 요즘 조각언어에 삶에 대한 성찰을 녹이려 시도해 온 작가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의 풍자적·장식적인 외형을 버리고 뭉툭한 몸 체나 철사, 나뭇가지와 결합된 기형적 인체상들로 변신을 시도했다. 도시 의 기계적 질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병든 내면을 드러낸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에 비해 홍명섭전은 관객들에게 무쇠나 나무로 만든 무거운 슬 리퍼를 끌며 전시장을 돌게 하는 방식으로 서서 걷기의 수직적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개념적 설치작업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젊은 작가들의 실험전도 드문드문 비친다. 11월8일까지 서울 인사동 허리 우드극장 옆 들머리의 컨테이너 상자 내 임시전시장(011-798-3496)에서 열리고 있는 김세진씨의 비디오설치전은 고정된 전시개념을 깨뜨리고 대 중적인 열린 미술공간을 시도했다는 점을 살 만하다. 서동화전은 작가가 직접 수작업으로 제작한 진짜 경비행기를 출품해 직접 날기를 체험한다는 이색 조형개념을 시도해 이채롭다. 완성도를 떠나 관객 입장에서 흥미롭 게 음미할 수 있는 틀거지를 갖춘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야외 나들이를 겸한 작품마당도 있다. 작가들의 시골 작업실을 관객에 완 전개방하는 오픈 스튜디오전이 그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하제마을 (0348-944-0369)의 ‘스튜디오 오픈전’(11월1일까지)에서는 김재홍, 김 승영, 최홍선씨 등 작가 8명의 그림과 조각, 도예작품 등을 선보이고 있 다. 나들이와 감상을 겸해 작가들과 편하게 대화하며 작품세계를 직접 접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화랑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의 감 상기회다.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경기도 장흥 토탈야외미술관(0351-40-5 791)에 지난 16일 문을 연 원로작가 김구림씨의 괴짜 설치작품 <뮤지움 카페>도 볼거리다. 폐차된 버스 안에 중고텔레비전, 철판, 드럼통 등을 배치해 카페 분위기를 만든 이 작품은 폐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재생의 의미를 미학적으로 탐구한다. 관객들은 직접 폐차 안에서 차를 마시며 놀 수도 있다.
야외 전시회도 볼만… 오원의 역작도
고미술 분야에서는 간송미술관(02-762-0442)의 오원 장승업 전(11월2일까 지)이 화제다. 도교적 세계를 다룬 도석인물화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 전 통 형식화의 마지막 불꽃을 지폈던 까막눈 화가 오원의 역작 50여점을 만 나 볼 수 있다. 비록 중국전통그림을 베낀 형식화를 답습했지만 도석화, 화조, 풍경화 등 모든 장르에 걸쳐 문기(文氣) 대신 주관적 감정을 자유 롭게 살려낸 그림에서 현대 한국화의 원조로서 근대미의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올 가을 주요 전시들의 주된 감상포인트는 해외미술전과 젊은 작가들의 실험전에 맞춰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작품들의 수준이나 기획력 등에서 전시회마다 편차가 큰 만큼 신중한 눈길로 작품들을 훑어보는 것이 필요 하다.
가을은 미술품 감상에 더없이 좋은 철이다. 기획방향이나 내용 면에서 요 즘 전시들이 대중적 구색을 갖췄다고 보기 힘들지만 작가나 큐레이터에게 호기롭게 작품설명을 부탁하며, 이곳저곳 발품을 들인다면 책 읽는 이상 으로 뿌듯한 문화충격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문화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