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
|
(사진/일본쪽 실행위원회 방한 대표단이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가협 양심수 석방을 위한 목요시위에 참가했다.)
일본인은 아시아의 영원한 적인가. 적어도 다수의 일본인은 그런 혐의에 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원죄가 씻겨지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민족 차별과 부락차별 따위도 원죄를 씻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최근 한-일 양국의 교류는 정치·경제 중심에서 문화·체육 등 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지만 양국간의 불신이 사그라 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1993년 8월 호소카와의 비자민 연립정권 탄생을 계기로 아시아관 에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에 대한 가해책임을 시 인하고 국경을 초월해 전쟁 희생자에 애도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전후 50년이라는 1995년, 일본은 무라야마 사회당 위원장이 이끄는 자민·사회·신당 사키가케 연립내각에 서조차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의 반성을 의미하는 ‘부전’ 결의도 국회 에서 이루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각료는 물론 지식인들도 침략의 죄 과를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으며 교과서는 여전히 편견으로 가득하다 .
아시아 패권 노리는 일본에 공동 대응
최근에는 한-일 시민운동세력 사이에서도 대립이 불거지기도 했다.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배상을 둘러싸고 한국의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와 일본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 화 국민기금’의 마찰이 그것이다. 국민기금에는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비 판적인 자세를 취하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후원했던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일한연대운동’의 중심인물이 나서 충격을 더하기도 했다. 당시 시 민연대의 집행위원장인 한신대 김성재 교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와 법 적 배상을 전제로 하지 않은 ‘국민기금’은 군국주의적 노선의 연장일 뿐이라며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지난 10월21일 서울에서 열린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제2차 한 -일공동심포지엄’(전국연합, 일본 공동심포지엄 실행위위원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후책임을 촉구하고 양국 민중운동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지난 3월1일 첫번째 한-일심포지엄은 일본에서 열어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에 대한 극복방향을 제시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한일심포지엄은 양국의 양심적인 진보세력들이 공 동의 관심사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는 측면에서 이전의 지식인 만남·교 류와는 성격이 구별된다. 진보세력이 정부에 대한 압력 행사 정도에 그치 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여는 데 함께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의 전후 청산 문제와 함께 아시아 지역의 평화 와 진보를 위한 연대 등을 깊이 있게 논의했다. 특히 미-일의 주도로 이 루어지는 신미일방위협력지침(신가이드라인)이 반평화적이고 패권적인 발 상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공동대처를 결의한 것은 소중한 성과로 꼽 힌다. 신가이드라인은 ‘일본주변사태’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한반도와 대만해협 유사시’ 대응을 공언하는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발 동하는 전쟁에 일본이 자동 참전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위대에 의한 타국 함선의 임검, 미국병사 수색·일본인 구출을 명목으로 타국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신가이드라인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사시법제’를 내년 정기국회 에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가이드라인’을 ‘전쟁시나리오’로 규정한 일한민중연대간담회 와타 나베 겐쥬 사무국장은 “일본 정부는 그동안 전쟁이 가능한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비전·비무장을 규정한 패전국으로서의 ‘전후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을 숙원으로 삼았다. ‘신가이드라인’으로 일본은 미군과 자 위대의 공동작전만이 아니라 지방자치체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국가총동 원체계의 구축을 겨냥하고 있다”며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위해서도 양국 의 민중이 일본의 전쟁정책에 공동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그는 오끼 나와 등지에서 반미군기지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와 한국 단체간의 연대 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국어대 법학과 이장희 교수는 신가이드라인이 중국의 패권주의를 자극해 동북아에 새로운 긴장의 원천 을 제공하고 있다며 “일본이 아시아 주변국가와 과거 식민지 상처를 치 유하고 아시아 국가간의 협조를 다지는 데 솔선수범하지는 못할망정 식민 지배의 악몽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세력 주도로 평화공동체 실현
일본 정부가 침략·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피해배 상을 비롯해 한-일기본조약의 재검토, 독도영유권 문제, 직선기선설정의 부당성 등도 한-일심포지엄의 주요 관심사였다. 한국 정부의 입국거부로 김포공항에서 되돌아간 일본의 월간 <일한분석> 편집인 기타가와 히로가 즈는 ‘어업협정 체결을 위해 과거청산이 필요하다’는 발표문에서 “신 어업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초조한 일본이 한국어선을 나포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 정부에 협정체결을 강박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다시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 와 함께 불평등한 어업협정을 막기 위해서는 ‘일-한기본조약’의 재검토 와 함께 식민지 지배를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청산이 양국 민중 연대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현재 진보세력의 연대는 정부나 재벌들의 국제연대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 다. 국가는 세계화·국제화를 내걸고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외교력을 동 원하고 있지만 민간세력의 연대는 뿌리가 깊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부당한 개입 등으로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진보세력 내 에서도 그 효용성을 의심하기도 한다.그러나 올해 초의 총파업 과정에서 보았듯이 진보적 평화세력의 국제연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의 사안을 가지고 도쿄에 이어 서울에서 열린 이번 심 포지엄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
김수병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