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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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 희뿌연한 담배 연기와 디제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뒤엉키던 곳. 아침에 한번 들어가면 푹신한 의자에 눌러앉아 하루를 죽칠 수 있던 곳. 간혹 통기타를 치는 무명가수의 열창을 들을 수 있던 곳. 그래서 시 간은 많고 돈은 없던 청춘들이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던 곳. 70년대 한 국의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세상에 없는 것들을 꿈꾸곤 했다. 자유, 낭만, 혹은 사랑. 가수 한대수(49)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머 리칼 부수수한 장발을 하고서.
조국은 마음의 고향일 뿐…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더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 오.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 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행복의 나라로>)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음악감상실은 연탄가게가 사라지듯 하나둘씩 자취 를 감췄고, 그곳을 찾던 사람들은 어느새 중년이 됐다. 통기타는 전자기 타와 드럼에 자리를 내주고, 소박했던 노래는 빠른 랩과 거친 록에 밀려 났다. 굵은 경상도 억양으로 기타를 타던 한대수도 세월의 흐름에 덧없다 . 허리엔 제법 살이 붙고 이마엔 가느다란 골이 깊다. 초등학교 졸업앨범 에 남은 몇장의 흑백사진들처럼 이제 그를 기억케 하는 건 몇곡의 노래다 .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오.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오.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네네.”(<물 좀 주소>)
그동안 세계의 이곳저곳을 흘러다녔다. 뉴욕에서 모스크바로, 도쿄로, 그 러다 서울로. 한가로운 여행이기도 했고 노래부를 무대를 찾는 목마름이 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미국이듯이 조국은 마음의 고향 일 뿐 그를 구속하지 않는다. 공연차 들른 한국은 오히려 낯설다. 그렇게 살면서 세계를 친구로 사귀었다.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이탈리아 프 랑스 콜롬비아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었고, 몽골인의 피를 받은 러시아 여 인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
그의 방랑은 어려서부터 시작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은 거리에서 아이들이 똥을 눌 정도로 가난했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절이었다. 소년은 그 때부터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풍요 속에서 자란 미국 아이들에게 그는 촌놈이었고, 별볼일없는 황인종에 불과했다. 한국에 돌아와도 마찬 가지였다. 가난한 한국 아이들에게 그는 버터냄새 나는 이물질이었다. 소 년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사진/도쿄에서의 공연.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를 노래한다. )
음악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베토벤과 바흐가 소년의 깊은 소외감을 달 래줬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음악광이었다. 전축 스피커에서 불이 나도록 교향악이 집안을 울리곤 했다. 그럴수록 소년의 외로움은 더욱 깊 어갔다. 마침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기타를 두드리며 엘비스의 노래와 몸짓을 흉내냈다. 그러다 비틀스를 만났다. 비 틀스는 그를 작곡으로 이끈 스승이기도 했다. 마음 속에서 떠도는 말들, 그것이 곧 음악이 될 수 있다니.
대학에선 수의학을 전공했다. 한국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국에선 지금 우유를 많이 먹지 않지만 조만간 우유를 많이 먹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거였다. 어릴 적 소똥을 삽으로 치우며 기진맥 진했던 기억이 새로웠지만 그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음악 외의 세상일 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동물을 수술하다 피를 보고는 질겁하고 말았다. 그래서 새로 택한 게 사진이었다. 요즘 그것으로 먹고 산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맥주도 찍고 자동차도 찍는다. 가수가 아닌 한대수는 상업사진 작가다.
그가 귀국했을 때 한국은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가 지배하고 있었다. 송창식과 윤형주, 김민기, 양희은이 선봉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서린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들은 소외감과 문화적 혼돈 속에서 달궈진 그의 노래에 박수를 보냈다. 시대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도 마찬가지였 다. 그의 앨범은 얼마 안 가 판매가 금지됐고, 그는 방송출연도 금지당했 다. 두번째 앨범 <고무신>은 음반이 나오기도 전에 녹음테이프가 압수당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탄압을 자신의 노래에 대한 오해이거나 이해일 거라고 말한다.
‘행복의 나라'는 멀었는가
“바람아 불어라. 불고 또 불어라. 우리 아버지 명태잡아 내일이면 돌아 온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명태를 잡아오면 명태국도 많이 먹고. 명 태국이 나는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명태국을 먹고 나서 명태가 몇마리 남는다면. 나머지 명태를 팔아서 고무신을 사서 신고 ”(<고무신>)
그 권력의 폭력을 군대에서 절감했다. 해군이었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순시를 오는 바람에 군기가 칼날이었다. 훈련을 나가면 바다에 둘러 싸여 석달 가량 썩은 김치를 먹고 살아야 했다. 고통에 겨워 자살하는 동 료도 있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삭막한 생활에 질식하기 직전 한 권의 책이 날아들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미국 의 가족들이 책표지를 뜯어내고 영문판을 보내온 것이다. 검열관한테 연 애소설이라고 속이고 읽었다. 자유가, 노래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는 권 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노래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일상화된 관념을 깨고 싶었다. 권력보다는 인간을 상대 로 한 노래였다. 그걸 듣는 이가 달리 해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노래가 권력과 갈등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래처럼 많은 사 람들이 즐기고 오래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영화 <대부>가 아무리 좋다 고 해도 몇번이나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틀스의 노래는 세계에서 끊 기는 날이 없지 않는가.”
지금도 자유의 노래를 부른다. 문명이 발달했지만 사람은 여전히 억압돼 있다. 삐삐, 주식시세, 예금통장 등 모두가 숫자로 통하는 요즘같은 시대 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지구를 한방에 날려버릴 핵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자본의 공세에 사람들은 무력하다. 인간을 해방시키겠다던 사 회주의는 무너졌지만, 인간을 부유하게 하겠다던 자본주의는 수많은 가난 한 자들을 낳고도 기승을 부린다. 그리고 허리가 동강난 조국 한국. 그래 서 아직도 그의 노래는 행복의 나라를 쫓는다.
사진 이정용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