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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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잃어버린 인연의 끈을 이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사연을 담는 월간지 <보고 싶은 얼굴>에 옛 친구와 가족 등을 찾으려는 신청이 끊이지 않는다.)
“저는 인천 축현국민학교 41회 졸업생입니다. 제가 6학년 때 그냥 좋아 했던 여자친구가 있었지요. 그때는 말도 못하고 그냥 지냈는데, 지금은 그 친구가 무척 보고 싶군요.”
“24년 전 경기도 문산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민문자씨를 찾습니다. 당시 가정문제로 어려움에 처했던 저에게 힘이 돼 주셨던 분으로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더 보고 싶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아스라한 추억 속에 남은 그 사람, 춥고 배고팠던 시절 서로에게 힘이 돼주었던 사람, 고향의 개울가에서 함께 멱을 감으며 설익은 우정을 나눴던 코흘리개 친구들. 무심한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 가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할까’ ‘얼만큼 변했을까’ ‘그도 나를 보고 싶 어 할까’ 추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인 지상정일 것이다.
가슴에 묻어둔 이런 사연을 널리 알려 끊긴 인연을 이어주는 매체가 인기 를 끌고 있다. 기존의 사람찾기의 경우 가출이나 실종 등으로 헤어진 가 족들이 방송매체나 행정기관, 관련 단체 등을 통하는 것이 전통적인 사람 찾기의 유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종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첫사랑 상대나 학교 친구, 군대 직장 동료나 은사, 은인을 찾는 경우도 부쩍 늘 고 있다.
진한 향수와 그리움… “나의 사람은 어디에”
이런 추세에 따라 텔레비전 등 방송매체와 컴퓨터통신망 및 인터넷 등에 는 그리운 사람을 찾는 사연들이 밀려들고 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각 시·도교육청에는 옛 스승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쇄도한다. 최근에는 사람을 찾아주는 전화에 이어 전문 잡지도 생겨났다.
이 가운데 매체영향력과 전파력이 강한 텔레비전이 끊긴 인연을 다시 맺 어주는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애틋한 사연과 감격 적 상봉장면을 담은 이런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향수와 그리움을 자극 함으로써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찾기 프로그램은 한국방송공사 1텔레비전 <아침마당>에서 매주 수요일 방영되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코너. 지난 96년 1월부터 방송된 이 프로는 주로 주부 시청자들의 신청을 받아 첫사랑 애인에서부 터 친구 스승 은인 등 추억의 인물들을 찾아 주면서 단숨에 인기프로로 떠올랐다. 이 프로는 애초 헤어진 가족뿐만 아니라 은인이나 옛 친구, 동 료 등을 찾아주었으나 헤어진 가족의 상봉을 우선 주선해달라는 참여자들 의 요구가 커 지난 3월부터 헤어진 가족찾기 전문프로로 전환했다. 이 프 로가 방송되는 날 아침이면 이산가족찾기를 방불케하는 눈물겨운 상봉이 자주 연출된다. 특히 출연자의 상당수가 여성들로, 집안이 가난해 ‘입 하나 덜기 위해’ 부잣집에 수양딸이나 식모로 보내진 경우가 많아 주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애초 특집으로 1회만 하기로 했다가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장수 하게 된 이프로는 지난 10월15일까지 3백45명이 출연해 3백8명이 사람찾 기에 성공해 90% 이상의 성공률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전화로 출연을 신청한 사람은 1만명에 이르며 전화인터뷰와 예심을 거쳐 방송에 출연할 수 있기까지는 6∼8개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호응이 크다. 이 프로를 맡고 있는 조연동 프로듀서는 “신청자의 기억과 헤어질 당시 사연의 정 확성 등을 토대로 상봉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우선 출연시키고 있다”며 “대부분 40대 이후 주부인 출연자들에게는 텔레비전이 가장 쉽고 확실한 사람찾기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6-8 개월 기다려야 방송 출연 가능
(사진/"그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헤어진 사람을 만나는 방송 현장은 생이별의 가슴아픈 사연에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한다. )
주로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이 출연하는 한국방송공사 2텔
레비전의
이 밖에도 문화방송 라디오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역시 매주 토
요일 옛 친구를 찾아주는 방송을 한다. 일부 신문이나 잡지 등에도 동창
이나 헤어진 친구를 찾는 고정란을 두기도 한다.
텔레비전 등 방송매체 외에 사람찾기 서비스를 가장 활발히 벌이고 있는
것은 컴퓨터통신망이다. 최근 통신인구와 네티즌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통
신망이나 인터넷은 새로운 사람찾기 창구로 부상하고 있다. 결혼정보업체
인 ㈜듀오는 피시통신 하이텔과 천리안에 ‘그리운 그 얼굴’ 코너를 개
설중이다. 하이텔은 초기화면에서 go pclove를, 천리안은 go human을 치
면 연결된다. 신청란에 본인의 이름과 출신학교 등을 적고 찾는 사람 이
름 등을 기재해 두면 된다. 여기에는 옛 친구나 학교동문 직장 및 군대
동료 등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끔 대화상대, 펜팔친구 등 새로운 인
연을 찾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최근 부쩍 인터넷 이용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해 인터넷에도 사
람을 찾아 주는 사이트가 생겨나고 있다. 취업정보 사이트인 ‘신바람일
터’에서 운영하는 ‘열린장터’(http://job.combase.co.kr/market)에서
는 옛 친구나 전우 은사 등 보고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란을 개설해
놓고 있다. 또 네티즌들을 겨냥해 전자우편 주소를 가진 사람을 인터넷에
서 찾을 수 있는 ‘포11’(http://www.four11.com) 등 사람찾기 사이트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보고싶은 사람이나 헤어진 가족을 찾는 전문지도 생겨났다. 지난 95년 5
월 창간된 월간 <보고싶은 얼굴>이 그것이다. 찾을 사람과 찾는 사람, 사
연을 담은 명단을 실어 비매품으로 전국 구청과 시청 민원실 등에 배포한
다.(문의 02-246-2274) 지금까지 약 1천건의 신청이 접수됐는데 옛 친구
등 그리운 얼굴을 찾는 경우가 60%, 헤어진 가족을 찾는 경우가 40% 정도
이다.
18년 동안 제약회사를 다니다 퇴직금 등을 들여 이 잡지를 낸 정건화(47)
씨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정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
는 일기장과 같은 것”이라며 “옛 인연을 다시 찾음으로써 성공한 사람
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 기회를, 실의에 빠진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
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사랑상봉회(02-745-0762)에서는 유료로 옛 친구 찾아주기 사업을 펼치
고 있다. 옛날 주소와 친구이름, 학교 졸업연도 등을 대면 전화번호부 검
색 등의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해준다. 실패한 경우는 무료지만 친구를 찾
았을 땐 5만∼7만원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이 전화의 경우 방송
과 컴퓨터통신의 역할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의뢰건수가 부쩍 줄어들고
있다.
이처럼 옛날에 헤어진 사람을 찾는 사례가 늘어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관계자들은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역사에는 지난날 우리 사회의 역사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옛 인연을 다시 찾고자 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
은 가난과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 이농현상, 급격한 인구이
동 등 전통사회가 급격히 해체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가족과 억지로 헤어진 사람 가운데는 딸들이 많은 것도 가난과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이 크다. <아침마당>에 출연신청을 한 사람들 가운데 여
자가 80%이며, 전문지 <보고싶은 얼굴>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도 30대 후
반∼40대 후반 여성이 80%를 차지하고 있다.
조연동 프로듀서는 “신청자 가운데 40대 주부가 가장 많다”며 “이 때
에 접어들면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인 안정을 찾고 지난날을 돌이켜보
며, 과거의 아픈 기억을 극복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는 것 같다”고 말했
다
그리운 사람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많았다
는 얘기다. 그것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그 속을 살아온 개인과 가족의
역사를 비켜가지 않고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각난 사연들을
모아 옛 인연의 끊을 이으려는 것도 어쩌면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서 찢
겨진 공동체의 모습을 온전히 되살리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
로는 우리 사회의 세태가 그만큼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데
대한 ‘정많은 한국인’의 무의식적 반작용일 수도 있다.
지창은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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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현대사 반영… 공동체 회복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