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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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서관을 꽉 채운 학생들. 영어나 상식 등 취업을 위한 책들이 전공관련 책들을 몰아낸 지 오래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순수 인문학을 교양으로 강의하는 다른 대학의 교수와 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강의가 수강인원 미달로 폐강 이 속출하거나 현격하게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우려할 만한 사실을 전 하고 있다. 이른바 ‘4년제 종합대학교’에서 어찌된 사실인지 교양과목 가운데 외국어 회화나 전산학개론은 시간표를 짤 수 없거나 아예 마비가 될 정도로 거의 전 학년 전 학과생이 수강하고 있다. 이것은 단상 정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장고를 요하는 매우 심각한 현실이다….” ‘강의실에 비친 인문학의 위기’. 어느 인문학 교수가 전문지에 기고한 ‘독백’은 현재 인문학이 부닥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학원 진학희망자 없어 대까지 끊길 판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에는 전국 21개 국공립 대학 인문대 학장들 이 제주대에 모여 ‘인문학제주선언’이라는 것을 채택했다. “이성의 회 복과 학문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정부에 촉구한 것이다. 올 8월 에도 전국 국공립대 학장 21명이 ‘교육부 장관께 드리는 대학교육의 올 바른 발전을 위한 건의문’을 교육부에 전달했다. 마찬가지로 “교육부는 학문 분야간의 불균형이 더이상 심화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건의문을 전달하기 위해 교육부를 방문했 던 학장들은 뾰족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전국 인문대 학장들의 이런 ‘집단행동’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의 깊 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인문학은 위기인가. 인문학이 위기라는 사실에 대해 이 분야 종사자들은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기인가. 일차적으로 인문학 종사 자들의 고민은 인문학이라는 지식 재생산체계의 위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 다. 학부-석사-박사 과정으로 이어지는 지식 생산체계가 고사지경에 이르 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꺼리면서 대학원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서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본과출 신 철학과 대학생은 30명 가운데 6명에 불과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 해 그룹을 짜고 여관에서 ‘합숙’했던 80년대 말의 풍경은 선배들의 무 용담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 가운데 비교적 ‘교수자리’를 구하기가 쉬웠던 국문학, 국사학 등도 대학원 지원자가 줄어들기는 마찬가지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경우 대학원을 진학하는 학생들이 20∼30%도 안 된다. 그나마 서울대는 나은 편이다. 사립대와 지방국립대는 대학원 존립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 다고 한다. “제자들이 실업자 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 사람기르기가 겁난 다” “배우겠다는 학생들도, 학문의 길로 나서겠다는 사람들도 날이 갈 수록 줄어든다”는 교수들의 탄식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을 존립터전으로 삼아온 인문학이 후속세대들의 대학원 기피현 상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 대신 취업이나 고시준 비를 선택한다.
하지만 학문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 현상일지도 모른다. 교수시장이 안정되면서 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 아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문학 종사자들에게 더 큰 위기로 다가오는 것 은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외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80년대 최고 인기 철학개론도 폐강 줄이어
세계와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서의 인문학, 인간에 대한 이해, 풍부한 상 상력과 창조력을 기르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대학생이라면 누구에나 꼭 필요한’이라는 교양적 성격을 갖는 인문학이 수요자인 학생들의 관심 을 끌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경우 올해 2학기에 개설된 철학 개론 2강좌가 5명이라는 최저 수강인원도 채우지 못해 폐강될 뻔했다. 가 까스로 폐강을 면하긴 했지만, 서울대 철학과의 한 교수는 “상당히 충격 적인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80년대만 해도 대형강의실에서 인기종목으 로 상한가를 구가하던 철학개론은 볼품없는 퇴물이 돼버린 것이다.
그나마 서울대는 증상이 뒤늦게 나타난 편이다. 이미 지방대나 중하위권 대학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병세가 완연했다. 전남대의 경우 90년대 들어 교양학부에서 필수과목이던 철학개론이 선택과목으로 변경됐다. 그뒤로 철학개론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 강좌수는 15개에서 10 개가 됐다. 서울시립대에서도 국사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뀐 다음 수강생들의 숫자가 줄었고, ‘한국사회경제사’ 등 몇 과목은 아예 폐강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 무엇이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는가.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 석이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영·미에서도 70∼80년대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돼 왔다. 이렇게 볼 때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71년 팍스아 메리카나가 깨지고 석유파동과 경제위기를 맞게 되면서 세계 자본주의는 케인스안 모델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복지국가의 틀을 깨고 철저하게 경 쟁에 기초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학문도 예외가 아니어서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는 지식과 학문은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받거나 아니면 도태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복지국가가 학문과 교육에 제공하던 지원들이 사라지 면서 경쟁으로 내몰린 ‘비생산적인’ 인문학은 지지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학생이나 사회적 수요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 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중앙대학교 강내희 교수(영문학과)는 “한국사회 도 90년대 들어 구조조정단계를 거치면서 자본축적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 고, 결국 대학의 학문도 틀자체의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학의 지식은 더이상 신뢰나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을 상품 으로 구매하고 있는 이해관계자들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 순수아카데미즘을 자처했던 전통적인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대학사회 내에서 이런 변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버티고 버티다가 이젠 아예 손을 놓은 형국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 가 상당 부분은 내부 구성원들의 책임인 셈이다. 일부에서 “80년대 사회 격변 속에서 상아탑 운운하며 몸을 사리던 교수들이 이제 와서 뒤늦게 인 문학의 위기를 논할 자격이 있냐”며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실참여를 외면하고 철저하게 학과별로 정원을 나눈 뒤 그속 에서 ‘권력’을 행사해왔던 교수사회가 자초한 위기라는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의 한 교수는 “학문영역을 각자가 확보한 떡으로 간주하여 남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거나 ‘예의’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 온 것이 문제였다. 학과 이기주의가 대학이나 사회 내에서 인문학의 성과 를 공유하지 못하게 했다”고 진단한다.
학과 이기주의나 대학의 편의주의는 변화를 담아낼 수 없었다. 서울대 철 학과의 한 대학원생은 “교수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적 수요에 맞춰 인문학과의 입학정원이나 대학원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당학과의 정원은 교수들의 영향력이나 연구비와 직결되 기 때문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라고 잘라 말한다. 대학도 손쉽게 ‘수입’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인문학 관련 학과의 정원을 늘리 거나 현상유지를 지켜왔다. 이·공계열은 실험실 등 부대시설 투자에 들 어가는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쉽게 정원을 늘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 국 인문학의 위기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요 고려없이 증원 학생들만 피해
인문학과 졸업생의 사회적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반면 인문학의 정원은 학과 이기주의나 대학의 편의주의로 최소한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 이러 한 수요와 공급의 괴리 속에서 인문학 전공 학생들은 취업을 걱정할 수밖 에 없다. “불쌍한 것은 우리들뿐이다. 고시준비만 한다고 우리한테 손가 락질할 수 있는가”라는 한 학생의 항변은 그래서 이유있다. 실제 ㄷ그룹 이 지난 3년간 채용한 인원은 인문사회계열과 상경계열을 통틀어 전체의 30% 안팎에 불과하다(표참조). 게다가 30% 가운데 또다시 30%는 법정·상 경계열이라고 그룹 관계자는 밝히고 있다. 반면 올해 4년제 대학을 졸업 한 인문사회·상경계열과 이공계열의 숫자(사범·의약·예체능계 제외)는 각각 11만2천2백23명과 10만1천9백73명으로 오히려 인문사회계열쪽이 많 다(97년 교육부 연감).
외부적 원인과 내부적 원인이 맞물려 나타나는 인문학 위기의 징후들은 인문학 자체의 성격변화를 강제하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이 생존을 위해 택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기도 하거니와 더이상 선택할 수 없는 유일한 탈 출구이기도 하다.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 의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도 위기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라 고 할 수 있다.
이용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