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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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수강생들이 빽빽한 움베르토 에코의 강의실. 프랑스 인문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고유한 영역으로 포괄함으로써 탄탄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한 사회에서 인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편차 를 달리한다. 영국쪽이 인문학의 위기로 몸살을 앓은 반면, 프랑스에선 아직도 인문학의 위상이 건재하다.
영국의 경우 70∼80년대 들어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했다. 대처리즘이 표방한 시장경제 지상주의로 영국사회의 골간을 이루던 인문학적 교양의 가치가 평가절하돼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학생들의 진 로선택이 졸업 뒤 취업이 잘되는 이공계와 비즈니스쪽으로 몰리면서 순수 학문 지원자가 대폭 감소했다. 자연계열에서는 수학과 물리학과, 인문계 열에서는 고전문학, 철학, 역사학 등의 인기가 급락한 것이다. 인문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과학 계열 학과도 된서리를 맞는다. 85년께 대처 총리는 당시 문교부 산하 대학교육진흥기금이던 ‘사회과학 연구기 금’을 ‘사회문제 연구기금’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사회과학은 과 학이 아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통합학문 바탕으로 연구영역 넓혀
대처리즘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진보적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를 중심으로 자구노력이 이뤄졌다. 이러한 노력 끝에 태동한 학문경향이 ‘ 문화연구’다. 문화연구는 문학, 어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을 망라한 통합학문이다. 이들은 통합학문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이나 소수 인종과 같은 하위문화와 영상매체나 대중매체,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섹스 같은 새로운 문화 지형들을 광범위하게 자신의 연구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문화연구학은 특히 신설된 대학교에서 대폭 수용해 현재 전국 1백여개 이 상 대학에서 정식학과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학교에서도 인문학을 재생시키려는 시도가 활발 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학, 문화, 역사, 지리학이 통합돼 광의의 인 문학으로 대체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이 성행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이를 수용 할 수 있었다고 영국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우리의 사회나 대학 조건과 는 다른 것이다.
프랑스의 사정은 영국과 다르다. 프랑스에는 아직 인문학의 위기란 없다. 철학이나 사학 등 전통적 인문학 분야가 갖는 영향력은 여전히 확고한 것 이다. 정보통신 등 실용학문쪽으로 확 쏠리고 있는 한국과 전혀 다른 모 습을 보이는 프랑스의 문화적 지형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미 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질 들뢰즈 등 인문학 분야의 거성들이 자체 영역을 튼튼히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 분야가 극히 분절화돼 있는 미국과 달리 인문사회과학이 경계 가 없이 넘나들고 있는 것 역시 프랑스 인문학의 깊이를 더해주는 이유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철학교수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예처럼 많은 학자들이 인접학문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 이와 함께 오랜 계급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학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회 전체가 어떻게 변화해가는가를 보는 사회변동론을 발달시켰고, 미시적인 분야보단 거시적인 구조 등에 주목하는 학문적 경 향을 보이기 때문에 쉽사리 부침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첨단산업 적응 뒤처진다는 지적도
이런 지적 풍토를 일궈가는 데는 초·중등교육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 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역사과목이 프랑스어 등과 함께 4개 주요핵심과목 에 포함되고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가 상당한 철학적·역사적 지식이 뒷받침되는 논리적 사유능력을 묻는 문제들을 출제하고 있는 것이 그 단 적인 예다. 결국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인문학을 할 수 있는 바탕이 형성 되는 셈이다.
물론 이런 교육방식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교육방식이 실용교육을 뒷전으로 물리고 있어 첨단산업인 정보통신사업에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 등이 그것이다. 극단적으로는 현행의 바칼로레아제도를 없애 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아직까지는 사회 전체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다.
파리=권태선 특파원 런던=권은정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