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중역인사 대선 뒤로 미뤄라”

(사진/"누가 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대선 눈치를 보면서 임원 정기인사를 늦추려는 기업들이 상당수다. )

해마다 7, 8월이면 중역인사를 해오던 한 중견그룹이 올해는 이례적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회사쪽은 이에 대해 “올해는 인사변동을 할만한 특 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룹 관계자의 설명은 달랐다. “아무리 말로는 정치권의 눈치를 안 본다고 해도 실제로 안 그럴 수 있 느냐”는 것이다. 재벌기업들이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에 진통을 겪는 것 못지 않게 임원 인사문제로도 고민하고 있다.


김대중·이인제 당선 땐 큰폭 변화

물론 기업들은 겉으로는 “인사의 시기나 방향은 대선과는 큰 관련이 없 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대외협력 업무를 담당할 부서에는 아무래도 새 정부와 선이 쉽게 닿는 사람들을 배치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는 게 기업 관계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예년 같으면 하나둘씩 인사가 시작될 때이지만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지 불투명한 만큼, 올해는 대선이 끝나야 본격적으로 인사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대기업 임원 인사의 향방은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느냐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서 주요그룹의 임원인사에서는 부산 ·경남(PK) 출신인사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ㄷ그룹 ㅇ아무개 상무가 지난 95년 인사에서 20여명의 선배임원들을 제치고 3단계나 파격적으로 승진해 사장으로 발탁된 것은 재계에서는 유명하다. 이를 놓고 당시 그룹 안팎에 서는 “경남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PK출신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ㅅ그룹에서도 현 정부 출범 뒤 당시 부사장이던 ㅈ씨가 예상을 뛰어넘어 사장으로 발탁됐다. 그 또한 경남고-서울대를 졸업한 PK 였다.

한 재벌그룹의 임원은 “이번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원의) 변동폭이 작겠지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큰폭의 변화, 이인 제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 망했다. 경복고와 서울대를 나온 또다른 그룹의 임원은 “이인제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고 해서 사장에 발탁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 다.

실제로 인맥을 중시하는 풍토를 반영하듯, 이번 대선전에서도 이회창 대 표가 신한국당 후보로 선출되고 한때 지지율이 50%에 육박하자, ‘대쪽주 ’라는 말이 증권시장에 나돌기도 했다. 이 총재와 같은 경기고와 서울대 를 나온 사람이 총수나 최고경영진을 많이 맡은 기업 가운데 일부는 이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주가도 오를 것이라는 뜻이 담긴 말이었 다. 그러나 ‘대쪽주’의 상승은 기아사태와 이 총재의 지지율 하락으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몇몇 기 업들이 벌써부터 호남출신 간부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몇몇 재벌기업의 경우는 그동안 호남출신을 우대하지 않은 것 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몇단계에 걸친 파격승진을 시킬 경우,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것을 걱정한다는 것 이다.

물론 인맥만을 고려한 인사에 대해서는 기업 안에서도 말이 없을 수 없다 .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면 주요 부처 장관이 바뀌는데, 기업이라고 해 서 뾰족한 수가 있느냐”는 현실론이 아직은 우세한 편이다. 우리나라 현 실에서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벌기 업들은 특히 기아의 제3자 인수문제나 현대의 제철사업 진출처럼 굵직한 사안일수록 인맥이야말로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 단하고 있다.


“서둘러 인사 했다간 큰코 다친다”

그러나 인맥을 중시한 인사가 결과적으로 가져올지도 모를 부작용을 우려 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현 정부 들어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와의 관계 때 문에 구설수에 올랐던 한 그룹의 관계자는 “그동안 정권교체기를 성장의 호기로 삼은 후발기업들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먼저 인맥 부터 가동하는 것이 기본이었다”며 “새 정부에 들어서도 무리한 베팅을 시도할 기업이 안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서둘러 임원인사를 단행하지 못하는 데는 올 하반기 인사가 감 원쪽으로 방향이 잡혀 있다는 점도 한몫 하고 있다. 상당수 기업들이 이 미 강도높은 구조조정 작업을 펴면서 임원들을 가차없이 잘랐지만, 하반 기 인사에서도 현대그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원 승진폭을 최소화한다 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한 그룹의 임원은 “이런 상황에서 서둘러 인사 를 했다가 인사에서 탈락한 누군가가 중요한 자료라도 빼돌려 공개하고 나서면 어떻게 하느냐”고 털어놓았다. 이래저래 기업들로서는 고민이 깊 어가는 계절이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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