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추적

기업들, 내년이 안 보인다

(사진/기업들은 환차손 줄이기에 비상이 걸린지 오래다. 7대 종합상사가 올 상반기에만 4백74억원의 환차손을 기록했다. )

기아사태의 후유증으로 공황위기로까지 치닫던 금융시장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김대중 비자금파문에 대한 검찰의 수사유보 발표에 뒤이어, 정부 가 기아사태를 법정관리쪽으로 방향을 정해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함에 따라, 그동안 폭락을 거듭하던 주식시장이 비교적 활기를 띠고 금리와 환율도 한때 내림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기업들은 여전히 “내년이 안 보인다 ”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앞으로도 금리, 환율, 그리고 주식시장이 어 떻게 움직일지 예측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확실성의 시대’ 다.


환율 내리기, 앉아서 기다릴 뿐

엘지경제연구원은 지난 9월, 올해 말 원화의 대달러 환율이 9백2원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연초에 환율을 8백65원으로 전망했다가 8월 초에 다시 8백80원으로 수정한 바 있는 이 연구소는 10월 들어 환율 이 9백20원대까지 오르면서 또한번 전망치를 수정해야 했다. 이창선 책임 연구원은 “연말 달러환율은 9백10∼9백30원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러나 경제의 불확실성이 너무 커져 전망 자체가 여간 어렵지 않다” 고 말했다.

이같은 혼란은 이 연구소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환율전망치를 이 미 몇차례씩 수정한 바 있는 대부분의 민간경제연구소들도 내년도 전망치 작성에서 마찬가지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국은행쪽은 “기아사태 해결 등 국내 금융시장 여건이 개선돼 앞으로 더이상의 환율급상승은 없을 것 ”이라고 전망했지만, 동남아국가들의 통화위기가 홍콩과 대만에까지 파 급되고 있어, 원화환율의 안정기조가 이어지지 못하리라는 우려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도 환율전망치는 연구소나 기업에 따라 낮게는 9백10원대 에서 최고 9백80원대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원들은 “그동안 전망치와 실제치의 차이가 하도 크다 보니 예측 자체가 두렵다”고까지 말한다. 기업 관계자들은 특히 “달러 환율이 경제여건보다는 통화당국의 정책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예측이 더욱 어렵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동안 환율급등에 따라 기업들은 환차손 줄이기에 비상이 걸린 지 이미 오래다. 7대 종합상사가 올 상반기에만 4백74억원의 환차손을 기록하는 등 올 들어 상장기업들이 입은 환차손은 이미 2조8천여억원에 이르는 것 으로 추정되고 있다. 달러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수천억원의 환차손이 발 생하고 있지만 단기간에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오직 환율이 내리기만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자금난 속 공격경영 자제

기업경영환경과 관련된 각종 변수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만큼 대기업들은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에 큰 진통을 겪고 있다. 늦어도 11월 말까지는 사 업계획을 최종 확정해야 하는데, 살얼음판을 걷듯 극도로 보수적인 사업 계획을 내놓거나 아예 사업계획 수립 자체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내년도 재무관리의 기본원칙을 손익이 아닌 현금흐름 개선에 두고 대대적인 투자재조정과 자산정리작업에 돌입했다. 삼성쪽은 내년 상 반기에도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시중실세금리가 12.5∼13%선을 웃돌 것이 라는 전망 아래 전체 투자규모를 올해보다 10% 줄인 7조6천억원으로 책정 했다. 매출목표도 올해보다 12% 늘어난 93조원으로 비교적 낮게 정했다. 삼성은 특히 장기투자재원은 무조건 장기자금으로 조달하고 단기운전자금 의 비중을 0%에 가깝게 운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현대그룹은 “내년 사업계획을 짤 때 이익위주의 경영과 수출증대쪽으로 기조를 설정하라”는 지침을 최근 계열사에 내려보냈다. 선경은 공격경영 을 자제하고 견실한 경영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으며, 한화도 재고자 산 감축,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에 내년 경영의 초점을 맞 추고 있다. 대우그룹만이 해외사업을 중심으로 비교적 공격적인 경영계획 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금호 롯데 동부 거평 등 대부분의 대 기업들은 좀더 관망하겠다는 자세로 사업계획 수립을 아예 늦추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환율, 금리, 대외신용도 등 여러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불투명해 사업계획을 짜는 데 확실한 기조를 설정하기가 어렵다”고 털어 놓는다.

기업들의 발걸음을 묶고 있는 족쇄는 무엇보다 자금조달 문제다. 우선 해 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부터가 조만간 호전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 우세 하다. 지난 7월 기아사태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해외에서 주식예탁증서 의 발행은 삼성전기(1억달러) 한건에 그쳤으며, 채권과 연계된 전환사채 는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6개 회사 3억달러어치만이 발행됐다. 해외증권의 가격도 폭락세가 지속됐다.


증자는 아예 꿈도 못 꾸고…

(사진/폭락을 거듭하던 주식시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회복여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

재정경제원에 따르면, 기아정상화방안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 10월22일 조 흥은행, 주택은행, 포항제철 등의 해외 주식예탁증서(DR)와 기아자동차의 해외 전환사채(CB) 거래가격은 일제히 급등세를 보였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조흥은행의 DR은 전날보다 0.25달러 오른 4.25달러, 주택은행 도 0.62달러 오른 15.62달러에 거래됐다. 그러나 이는 기아사태가 발생하 던 무렵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가격이다. 지난 7월14일 조흥은행의 DR은 7.3달러였다. 더욱이 기아자동차에 대한 여신을 출자로 전환하게 된 산업 은행은 해외에서 발행한 채권의 유통가산금리가 급등했다. 산업은행이 발 행한 양키본드의 유통가산금리는 4년만기짜리의 경우 전날의 1.14%에서 1 .22%로, 5년만기짜리도 1.18%에서 1.27%로 올랐다. 투자자들은 기아의 리 스크가 산업은행으로 그대로 이전됐을 뿐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은 행들이 막대한 부실여신을 떠맡고 있는 만큼 주요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국가 및 은행에 대한 신용등급도 하향조정돼 있다. 미국의 S&P사는 지난 2일 한일, 외환, 신한은행의 신용등급을 한단계씩 하향조정했다.

하지만 국내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조달도 결코 여의치 않다. 증자나 회사 채 발행계획은 이미 상당 부분 공중에 떠버렸다. 올해 5대 그룹의 유상증 자 한도는 1조4천9백여원이지만, 이들 기업이 이미 실시했거나 연말까지 실시할 계획인 유상증자 규모는 5천9백71억원에 불과하다. 5대 기업이 이 런 상황인 만큼 중견기업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증자는 아예 꿈도 못 꾸고, 회사채 발행도 보증을 서주겠다는 곳이 별로 없는 형편이다.

상장이나 코스닥 등록을 추진하던 기업들도 잇달아 이를 연기하거나 공모 계획을 철회했다. 증권감독원에 따르면 이달중으로 공모주 청약을 실시할 예정이던 스탠더드텔레콤 등 2개사가 공모를 한달간 연기했으며, 레더데 토 등 코스닥시장 등록을 추진하던 5개사는 계획을 철회했다. 공모가격 하락에 따른 조금조달 규모 축소에 대한 우려와 함께 공모주를 과연 소화 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증시가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로서 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기업관계자들은 “차입경영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가 이렇게들 막히고 있으니, 구조조정 노력이 허사가 될 수밖에 없 다”고 불평한다.


외국인 투자자들 이탈 계속

비록 기아에 대한 법정관리 방침 발표 뒤 주식시장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 고 있다고는 하지만 증시의 지속적인 회복여부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무 엇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증시이탈이 계속되고 있다. 외국인투자자들은 10월에만 23일까지 모두 5천4백20억원어치를 순매도하면서, 기아사태 해 결방침에도 불구하고 증시 역사상 월최대매도기록을 날마다 갈아치우고 있다. 증권감독원은 이에 대해 “11월3일 외국인 투자한도확대를 앞두고 교체매매 성격이 짙다”고 보고 있지만, “외국인들이 그동안 선호해왔던 한전, LG전자 등의 주식마저 매도에 나서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교체매매가 아니다”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종합주가지수도 하루 등락폭이 20포인 트에 이르는 등 아직은 작은 변수에도 널뛰기를 계속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23일 은행 종금사 증권사 등에 3조원을 공급해 금융시 장안정 의지를 강력히 천명했다. 한은쪽은 “거시경제지표가 호전되고 있 는데다 기아사태 해결로 예측불가능성이 해소된 점을 감안하면, 금융시장 은 안정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아직 도 불투명성을 가중시킬 요인은 많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기아사태가 얼마나 빨리 수습국면으로 전환될 것 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산업은 행 대출금의 연내출자전환 등 정부의 방침대로 기아사태 해결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금융불안기미는 재연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법정관리에 강력 히 반발해온 기아노조와 노동계의 파업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그 파장도 결코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은행들이 추진중인 협조융자 협약이 제대로 작용하느냐 여부도 중요하다. 만일 협약이 정상적으로 가동돼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대출 이 이뤄지면 연쇄부도사태는 어떻든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은행들은 “제2, 3금융권이 배제된 상황에서 협조융자협약이 기업을 살리는데 과연 효과가 있겠느냐”며 협약무용론을 거론하는 등 애초부터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다. 은행들은 협약을 한시적으로만 운영하고, 자격미달 기업들의 융자신청을 막기 위해 협약적용대상에 일정한 제한을 둘 방침이어서 효과 가 그리 클 것 같지는 않다.


정치권 악재 얼마나 갈까

정치권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점도 아직은 불안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요소다. 신한국당의 분당위기 등으로 정국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게다가 새 정부가 어떤 경제정책을 펼지 아직 불확실한데다가, 올해 발생한 부실 기업의 처리문제도 내내 풍파를 부를 것”이라며 “내년 상반기까지는 결 코 전망이 밝지 않다”고 말했다.

기아사태는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을 그렇게 가중시킨 채 이제 해결이냐 더 큰 파국이냐의 기로에 서게 됐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금융기관들 이 일제히 가계자금의 대출금리를 1∼2%씩 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국민들 에게 고스란히 떠안기고 있다. 그러나 재벌기업들이 누구를 탓하기에 앞 서, 무차별적인 차입경영과 무리한 투자 등 그동안의 고질병이 결국 오늘 의 사태를 불렀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각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1월06일 제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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