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기아 법정관리 ‘검은 손’은 누구냐

(사진/"법정관리 신청 철회하라." 다른 완성차업체 노동조합도 동조 파업을 계획하고 있어 기아사태는 전 자동차업계로 번질 전망이다.)

지난 8월 초 과천 재정경제원 청사에서 정부의 기아그룹 처리대책을 담은 짧은 보고서가 외부로 유출된 적이 있다. 내용은 간단했다. 김선홍 기아 그룹 회장이 계속 물러나지 않을 경우 기아를 부도유예협약에서 제외해 법정관리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또 법정관리에 따른 후속조처 로 산업은행 출자전환과 중소하청 협력업체에 대한 특별지원대책 등의 시 행도 거론했다. 정부가 기아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적용과 긴급지원자금 제공의 전제로 김 회장의 즉각적인 사표, 직원감축에 대한 노조 동의서 제출을 강경하게 요구하던 당시 상황에서 보고서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공기업화는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역행

기아쪽에서는 즉각 “정부가 기아를 법정관리 뒤에 제3자(삼성그룹)에 넘 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이 나왔지만 “실무진들이 대책을 다 양하게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실효성이 없어 이미 폐기된 내용 ”이라는 재경원의 해명에 묻혀버렸다.

그로부터 70여일 뒤인 10월22일 강경식 재경원 장관은 과천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격적으로 기아 정상화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은 ‘기아 의 법정관리 신청과 산업은행 대출금의 출자전환’으로 바로 재경원이 부 인했던 보고서 내용 그대로였다. 강 부총리는 법정관리 신청 이유로 △기 아와 채권금융단의 자율적 협의로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 사태가 더이상 장기화될 경우 협력업체의 자금난 등으로 기아차의 정상화 자체가 불가능해질 우려가 크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는 26일 ‘KBS정책진 단’ 프로그램에 나와서도 “법정관리는 기아차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정부의 법정관리 신청은 기아를 살리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인가? 그러나 그 대답은 불행히도 “아니다”라는 것이 재계의 지배적인 시각이 다. 재계는 무엇보다 기아를 모범적인 공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강 부총 리의 말에 코방귀를 뀐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기존 공기업들도 경영효 율성을 높이기 위해 민영화가 추진되는 시점에서 자산과 연간 매출액이 7 조원에 이르는 거대 사기업을 다시 공기업화한다는 말을 믿어야 하느냐” 고 고개를 저었다. 한마디로 기아차의 법정관리는 제3자인수로 가기 위한 수순밟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강 부총리가 ‘KBS정책진단’에서 “정부 가 인위적으로 3자인수를 추진할 생각은 없지만 공기업화 방안이 실패할 경우 3자인수 등 다른 대안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런 점에 서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22일 첫 발표 때는 법정관리인을 기아 내부인사 로 기용하겠다고 밝혔다가 바로 며칠 뒤에는 기아 내부인사(사장), 외부 인사(법정관리인), 채권금융단 인사(자금관리인) 등 3명으로 공동경영토 록 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도 기아 임직원들과 노조의 반발로 사태가 장 기화될 경우에 대비해 기아 경영권을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사전포석으로 읽힌다.

강 부총리는 그동안 기아사태에 대응하면서 철저한 이중 플레이로 일관해 왔다. 겉으로는 채권단과 기아가 자율적으로 알아 처리하라는 시장원리를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금융기관을 조종하는 ‘검은 손’ 구실을 해왔다. 채권단을 다그쳐 사실상 기아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적용 중단과 화의신청 동의 거부를 강행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번 법정관리 신청만 해도 지난 9월 말 채권단이 직접 기아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정부가 전면에 나서 뒤집은 것이다. 주식시장 폭락사태와 대기업들의 잇단 부도위기, 외환시장의 동요 등 경제전반에 걸친 위기감으로 국민여론이 기아사태 조기해결에 매달리고 있는 시점을 절묘하게 이용해 강 부총리의 별명답게 초강경수를 쓴 것이다.

불신 커 법정관리인 선임 어려워

정부가 그동안 김선홍 기아회장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기아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명분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선홍 회장이 기아 경영부실에 가장 책임이 무겁다는 데 이의 를 다는 사람은 없다. 김 회장이 줄곧 “기아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면 물러나겠다”고 말해 온 것도 이런 여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추궁과 기아 경영정상화를 위한 역할 사 이의 선후문제나, 자신을 던져 기아 회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기보다는 자 리에 연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김 회장에 대한 비판과는 관계없이 정 부가 그동안 보여준 부실기업 처리방식은 기아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형 평성을 잃은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치권의 비호에 힘입어 수천 억원대의 은행권 자금지원을 받은 한보나 부도유예협약 적용을 받으면서 도 경영권 포기각서를 제출하지 않고 버티다가 갑자기 화의를 신청한 진 로를 제쳐놓더라도 최근 쌍방울이나 해태, 뉴코아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서 정책의 일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정부는 종금사 등에 대출금회수를 하 지 않도록 요청하는가 하면 아예 금융권에 각기 1천억원대의 협조융자를 해주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27일 김영삼 대통령 주재 아래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열고 기아후속 대책으로 △할부금융사의 수요자금융 정상취급 △수출환어음(D/A) 한도 5 억달러에서 8억달러로 확대 △중단됐던 협력업체 특례보증 재개 △협력업 체 보유 기아부도어음(약 3천억원) 일반대출로 전환 등을 내놓았다. 결국 그동안 기아가 경영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간청했음에도 정부가 외 면했던 내용이다. 기아그룹의 엄성룡 홍보이사는 “정부가 진작에 이런 조처를 취했다면 기아정상화는 훨씬 쉬웠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산업은행 등 채권금융단이 지난 25일 법원에 기아차와 아시아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함으로써 기아처리는 정부가 의도한 수순을 밟고 있지만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어 낙관하기는 아직 힘든 상황이다. 22일부터 전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조가 계속 강경한 태도를 지키고 있고 11월 초부터 는 다른 완성차업체 노조도 파업에 동조할 태세다. 기아 경영진이 계속 출근투쟁을 벌이면서 25일에는 “법정관리 신청에 위법소지가 있다”며 법원에 기각요청을 제출하는 등 법적·물리적 대응을 총동원하고 있다. 법원이 현 시점에서 “화의가 법정관리보다 채권자 일반의 이익에 더 적 합할 때는 법정관리신청을 기각해야 한다”는 회사정리법 조항을 들어 기 아의 주장을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정부에 대해 극도로 거부 감을 보이고 있는 기아의 전·현직 임원 중에서 법정관리인을 선택하는 것부터 당장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김 회장 직계라인을 배제하고 한승준 전 부회장이나 도재영 전 부회장(김영삼 대통령의 손아래 동서), 이기호 전 그룹 종합조정실장 등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으나 임직원들의 지지를 못받는 법정관리인이 제구실을 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또 정부는 산업은행 대출금의 출자전환을 위해 주총을 연 뒤 증자 및 발행된 주식의 제3자 배정(산업은행)에 관한 특별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나 기아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지분 합작선인 포드(마쯔다 포함)를 포함해 50%를 넘는다며 강한 저지입장을 보이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검찰에서 느닷없는 김 회장의 개인비리 내사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기아 경영진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으름장이라 할 수 있다. 김 회 장 개인비리에 대한 소문은 이미 사태 초기인 7, 8월부터 흘러나왔던 메 뉴다. 증권가에는 김 회장의 기아차 지분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0.06%(지 난해 말 기준)보다 훨씬 많은 10%대에 이르고, 막대한 설비투자 자금을 유출해 개인적인 치부에 썼으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과거 정권 실력자에 엄청난 정치자금을 갖다 바쳤다는 루머들이 흘러다녔다. 기아의 한 계열사 사장은 “한국적 경영풍토에서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라면 털어 서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그러나 김 회장이 개인적으 로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은 음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현 정권이 집권초기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을 국세청을 동원해 ‘더러운 축재 자’로 매장했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김 회장에 대한 위협이 단지 말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흥미로운 것은 기아 안에서 “현 정권의 전·현직 실세들의 비자금 수수내역을 김 회장 등 기아 경영진이 상당 부 분 알고 있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아의 공기업화 방침을 밝힌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어차피 법정관 리 후 기아의 최종운명은 단시간 안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나 정부가 특정세력과의 유착 의혹을 기 정사실화하면서까지 제3자인수를 강행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기아의 최종 종착지는 차기정권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와 관련 기아의 한 임원은 “기아의 화의절차를 지지했던 김대중 국민 회의 총재가 집권할 경우 기아는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분리 원칙에 상처

경제계에서도 한국 기업사에서 유례가 없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지켜온 기 아자동차의 좌초는 일개 기업의 성패에 그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 라는 우리 경제의 과제에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재계에 서 기아의 제3자인수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꼽혀 온 노조문제도 기아 행로에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재계가 껄끄러워하는 기아 단협 내용(주당 41시간 근로, 징계위원회 노사동수 구성 등)은 내년 3월 말이 만료시한이고, 이를 고치려면 기아노조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현대, 대우, 삼성 등 기아를 둘러싼 다른 자동차업체들이 아직은 기존입 장을 고수하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을 염 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아와 아시아차 인수협상을 벌여 온 대우와 현대는 삼성의 기아인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데 뜻 을 같이하고 있어 진작부터 기아인수에 뜻을 둬온 삼성과 차기정권에서도 한판경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