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동부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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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 역삼동 뱅뱅네거리에 신축중인 동부그룹 신사옥. 동부그룹은 대우와 함께 짧은 기간 동안에 급성장한 재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은 올해 나이 53세로 재벌 총수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든다. 그러다 보니 가끔 “창업 2세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 그러나 그는 엄연한 창업주다. 그는 고려대(경제학과) 4학년에 재학중 이던 지난 69년, 24세의 나이로 동부건설의 전신인 미륭건설을 세워 오늘 날 재계 순위 22위인 동부그룹의 발판을 닦았다. 창업 28년, 사람의 나이 로 치면 20대 후반인 동부그룹은 대우와 함께 짧은 기간 동안에 급성장한 재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중동특수’에 신호탄을 쏘다
제3공화국 시절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진만씨의 장남인 김 회장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기업을 일으킨 것 아 니냐”는 시선을 가장 싫어한다. 자신이 몸소 사우디 건설현장을 누비며 고생하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동부그룹이 오늘날 30대 재벌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도 70년대의 중동특수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데 대해 그룹 안팎에서는 별 이견이 없다.
당시 이름조차 변변히 알려지지 않아 있던 미륭건설은 지난 75년 4월 미 군의 사우디 쥬베일 해군기지 건설공사를 따내 건설업계를 감짝 놀라게 했다. 그것도 회사쪽이 뽑은 견적이 1천7백만달러였는데 과감한 수주전으 로 무려 3천7백70만달러에 낙찰받았다. 이는 국내 건설업계에 이른바 ‘ 중동특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미륭건설은 이어 77년, 당시 중동지 역 최대 건설공사의 하나였던 미육군 공병단의 제다 해군육상기지 건설공 사를 2억5천만달러에 따냈다.
미륭은 두 공사에서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7천만달러에 이르는 순 익을 내면서 중동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건설업체로 떠올랐다. 동부 관 계자는 “85년 공식 철수할 때까지 10년간 20억달러에 이르는 40여건의 중·대형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국내에서 기업을 새로 설립하고 다른 기업 을 인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부그룹은 71년 동부고속, 이듬해 동부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하는 한편으 로, 그동안 지속적인 기업인수를 통해 사세를 급속히 키워왔다. 74년 삼 척산업(현 동부산업)을 시작으로 한국자동차보험(83년, 현 동부화재), 일 신제강(84년, 현 동부제강), 영남화학(87년, 동부화학에 편입) 등 굵직한 업체들을 잇따라 품에 안았다. 95년에는 한농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같은 기업인수와 설립을 통해 동부는 오늘날 제조·화학, 건설·유통, 금융· 보험 부문으로 그룹의 세 틀을 갖췄다. 각 부문의 매출비중이 3:3:4로 균 형을 이룰 만큼 사업다각화에 일찌감치 힘을 쓴 것도 독특하다.
그러나 지난해 동부그룹의 경영실적은 그다지 양호한 편이 못 된다. 3월 말 결산기업을 포함해 지난해 그룹 전체로 72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변변 치 않다. 동부생명과 증권이 합해 4백24억원의 적자를 낸 것이 화근이었 다. 95년 인수해 올해 초 동부화학을 합병한 동부한농화학도 2백34억원이 적자였다. 동부화재가 5백75억원의 엄청난 흑자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룹 전체로도 적자를 면하지 못할 뻔했다. 미국의 에릭슨사와 기술제휴를 통 해 주파수공용통신(TRS) 사업권 경쟁에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그것도 물거 품이 됐다.
동부상호신용금고, 99년께 지방은행으로
(사진/충남 당진 고대공단에 건설중인 동부그룹의 냉연공장. 이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 동부제강은 국내 최대의 냉연강 생산설비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97년 상반기 현재 내부 유보율 696.9%로 30대 재벌 가운데 1위, 자기자본비율 28.5%에 부채율 251%로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건 실하다는 점이 동부의 자랑거리다. 그런 만큼 올해 재계의 최대 화두인 사업구조조정이나 재무구조 개선은 애초부터 동부와는 거리가 멀다. 계열 사간 거래비중도 30대 그룹 평균 35%에 크게 못미치는 2.76%에 불과해, 재경원이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결합제무제표의 작성 의무화 방침에도 동부 는 끄떡 않는다.
동부그룹은 지난 95년 김 회장의 제2의 창업선언과 함께 그룹의 새로운 비전을 일찌감치 마련해 실행에 옮기고 있다. 세계일류의 철강기업을 꿈 꾸는 동부제강은 지난해 10월부터 충남 당진군의 고대공단에 모두 1조원 을 투자해 연산 1백30만t 규모의 냉연공장을 짓고 있다. 현재 51%의 공정 을 보이고 있는 이 공장이 내년 10월 가동을 시작하면 동부제강은 국내 최대의 냉연강 생산설비를 갖추게 된다.
보험과 증권, 투자신탁, 창업투자, 할부금융 등 금융계열의 라인업을 비 교적 잘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동부는 앞으로 금융부문을 더욱 강화해 종합금융그룹으로 변신하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우선 내년 초 카드회사와 선물중개회사를 설립하고, 99년에는 국내 5대 금고 중 하 나인 동부상호신용금고의 지방은행 전환을 꾀하고 있다. 동부증권도 금융 상품 업무를 M&A 등으로 확충해 종합금융회사로서의 성격을 갖출 계획이 다. 95년 한농을 인수함으로써 농업화학분야의 기술과 노하우를 끌어들인 동부한농화학을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유전자공학 부문을 21세기 주력사업 가운데 하나로 키울 계획이다.
그러나 올해 동부를 둘러싼 재계 최대의 화젯거리는 역시 메모리 분야 반 도체 사업 진출계획이다. 동부는 지난 7월 산업은행 등에 1조6천억원에 이르는 은행대출을 위한 사업성 검토자료를 제출했다. 차세대 메모리 공 장을 짓는 데 드는 총 1조9천억원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동부 는 올해 초 동부전자를 설립하고, 충북 음성에 월 3만장(8인치 웨이퍼 기 준) 생산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일부 부지에 대해서는 이 미 공사에 착수했다.
차세대 메모리 공장 건설 돌입
그룹쪽은 반도체 사업 진출에 대해 “결코 노다지를 캐려는 것은 아니다 ”고 강조한다. 다만 반도체는 앞으로도 해마다 15∼20%씩 고성장이 계속 될 것이며,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64메가D램이나 256메가D 램 생산에 먼저 뛰어든다면 앞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리라는 계산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계획대로 99년 초부터 생산을 시작할 경우, 첫해 2 천4백억원의 적자를 내겠지만 2000년부터는 해마다 2천억원 정도의 수익 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김 회장의 반도체 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싹터왔다. 동부그룹은 82 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몬산토사와 손잡고 반도체 기초소재인 실 리콘 웨이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뒤 몬산토가 철수하면서 그 지분을 LG가 인수한 ‘코실’에 49%의 지분을 갖고 계속 참여하면서, 94년 국내 최초로 다결정 실리콘 제조공정기술을 개발해 독일에 수출하는 등 그동안 사업진출을 위한 기반을 꾸준히 다져왔다.
반도체 사업진출에 대한 김 회장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룹의 기존 사업분 야인 소재금속과 화학분야를 활용해 창출해낼 수 있는 최적의 산업이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은행권에 사업성 검토자료를 제출한 뒤 그룹 임원들을 상대로 3시간 가까운 특강을 실시하면서 “나를 믿고 따르라”는 뜻을 강 력히 천명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수치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김 회장에 대 해 그룹 관계자들은 ‘그룹 내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라는 칭호를 아끼 지 않는다. 그룹의 3대 사업부문에 부문 부회장 직제를 신설하고 결재권 을 대폭 이양하면서 한신혁(52) 그룹 종합조정실장을 동부전자 사장으로 겸임발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기술제휴선인 IBM과도 협상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섰다고 회사 쪽은 전한다. 생산제품은 당초 64메가에서, 64메가 시장의 형성이 당초 예상보다 앞당겨지고 있는 만큼 처음부터 256메가를 생산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시장상황에 따라서는 64메가 3세대 제품도 탄력적으로 생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부 반도체 불가론’ 견제 움직임도
그러나 동부의 반도체 사업이 순탄하게 이뤄질지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 다. 동부는 금융문제와 관련해 일단 정공법으로 나가고 있다. 산업은행을 주간사은행으로 5∼6개 은행이 참여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방식이다. 금 융기관들은 그러나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부실여신이 늘어나면서 지극히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금융시장이 불안정해 특히 외화부문이 어려 워지면서 금융기관들이 그만한 자금을 쉽게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인 시각도 있다. 불황 등 위기상황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전체 투 자액의 3분의 1 이상은 자기 자금으로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금융권은 현재로선 한국기업평가와 AT-Courney가 10월 초에 내놓 을 사업성 검토 최종결과를 본 뒤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는 태도다.
인력확보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제다. 현재 동부가 기존 3사로부터 직간접 적으로 데려온 인력은 모두 50여명이다. 기존 반도체 3사는 벌써부터 동 부의 인력 스카우트에 비상이 걸려 있다. 일부 업체는 동부의 마케팅능력 취약 등을 거론하며 ‘동부의 반도체 불가론’을 유포하는 등 경계의 눈 길마저 보내고 있다.
결정에는 신중하지만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끝까지 밀고나가는 것으로 유명한 김 회장이, 투자시기가 수익성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반도체 사 업 진출과정에서 다시 한번 그 뚝심을 보여줄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