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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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던 자연이 인류를 향해 보복이라도 하듯 붉은 연무를 내뿜으며 타오른다. 주변국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까지 연무현상으로 뿌옇다.
보르네오섬의 인도네시아령인 칼리만탄 남부에 있는 인구 2천여명의 소도 시 바뚜까장은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주변이 온통 뿌연 연무투성이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4시간을 비행해 발릭파판시에 도착한 뒤 승용차로 밀 림을 가로질러 난 도로를 두시간 이상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오지가 불타 고 있는 것이다. “밤새 화염에 휩싸인 열대 우림의 거목들이 마치 붉은 숫덩이처럼 타오른다. 숲이 뿜어내는 연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50m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심한 적은 없었다’며 목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코데코의 바뚜까장사무소 김용규 팀장은 “불길을 피해 세간살이를 들고 뛰는 주민들은 비가 내려주길 빌며 하늘만 바라보 고 있다”며 불타는 섬 칼리만탄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 집어삼키는 화마
지구의 허파인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이 불타고 있다. 눈앞의 경제적 이 익을 위해 대규모 벌목과 화전으로 고통받던 자연이 인류를 향해 보복이 라도 하듯 붉은 화염과 하늘을 뒤덮은 연무를 내뿜으며 타오르고 있다. 지난 6월 칼리만탄과 수마트라섬의 방화로 시작된 불길은 3개월째 접어들 며 17개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임업장관 드자말루딘 수료 하디쿠스모는 9월25일 “곧 불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수마트라 칼리만탄 리아우 등 모두 17개지역에 5백60여개팀 8천4백여명의 소방인력을 투입했고 모두 31억 루피아(약 1백만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방출해 대대적인 진화작업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의 이런 노력이나 장담에도 불길은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네시아 항공우주국 원격통제실 부실장 마디 카르타사스미타는 위성사진 판독결과를 근거로 “칼리마탄 지역의 불길은 남동쪽으로, 수마트라의 불길은 남쪽으로 계속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연의 재앙으로 인한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22일 남칼리만탄주에서는 짙은 안개 속에서 국기게양식을 치르던 학생들 가운데 20여명이 호흡곤란 으로 병원에 실려갔고, 불길이 가장 세차게 타오르는 서칼리만탄주 본티 아낙에 있는 학교들은 23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북수마트라주의 주도인 메단 지역은 더욱 심각하다. 격렬한 불길과 짙은 연무 때문에 비행기 운 항이 불가능하다. 26일에는 2백34명을 태우고 자카르타를 출발해 폴리니 안 공항으로 향하던 에어버스 A-300기가 메단 남서쪽 30km 지점인 시보란 트기 지역에 추락,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시장 집무실 앞 등 시내는 가시거리가 5m 이하로 떨어져 운전자들은 대낮에도 전조등을 켠 채 운행 하고 있다.
<자카르타 포스트> 등 현지언론들은 불길이 번지고 있는 수마트라와 칼리 만탄의 절반 지역에서 비행이 불가능하고 24일부터 이번 불로 가장 큰 피 해를 입고 있는 리아우 잠비 남부수마트라 칼리마탄 지역의 주민들이 산 소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 전역은 물론 인근 동남아국가가 환경재앙으로 인한 불안에 떨 고 있고 또 대규모의 인명피해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고 있는데도 인도네 시아 정부는 지난 24일에야 운무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26일 현재 화재로 인한 공식 사망자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정한 2명과 말레이시아 정부가 인정한 1명뿐이다. 그러나 연무로 구호품을 실은 항공 기 운항이 불가능해졌고 이 때문에 가뭄피해가 심한 뉴기니섬 인도네시아 령 아리안 자야에선 기아와 콜레라 등 질병으로 2백71명이 이미 숨을 거 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수만명이 질병, 반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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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환경재앙. 이번 불길로 수만명이 호흡기 질환에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콸라룸프르 시민들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사실 이번 불로 인한 피해는 집계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동안의 불로 수마트라와 칼리마탄 등 17개 지역에서 30만ha의 숲이 잿더미로 변했고 3만2천여명의 주민이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산할 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피해가 정부의 예상을 훨씬 뛰 어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4일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도착한 세 계자연보호기금(WWF) 회장 시에드 바버 알리 박사는 위성사진 판독결과를 근거로 “피해면적이 60만∼80만ha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번 화재를 “국제적인 재앙”으로 규정한 그는 “화재를 어떻게 진압하느냐가 문제 인데 그 대답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홍콩대학의 오염전문가 앤서니 헤들리 교수는 “수만명이 질병에 걸릴 것으로 보이며 이중 절반 가량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오염된 대기중의 미세입자가 폐에 들어오 고 혈류에 흡수돼 심각한 호흡장애와 혈액조밀화를 초래하고 있다. 폐기 종 머리혈관 질병, 심폐혈관 질병 등이 잇따를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 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연무로 피해가 잇따르고 있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의사 자야발란 탐바야파도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연기와 스모그 속엔 심장병과 폐질환 등을 악화시키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오염된 대기중에 일산화탄소 아황산가스 오존 납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 열대우림지 화재로 인한 스모그로 인도네시아인 3만2천명과 말레이시아인 1만5천명이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연무가 퍼진 말레이시아 싱 가포르 등 인접국가 주민들 4천만명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게 동남아 국가들의 추산이다.
금세기 최고의 환경재앙
인류의 허파인 열대우림을 파괴해온 인간에 대해 자연이 대규모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대재앙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러나 화 재의 책임을 둘러싼 나라 안팎의 비난으로 궁지에 몰린 인도네시아 정부 는 이번 피해를 엘리뇨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회서비스 차관 아즈와라 아나스는 22일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는 데 늦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이다. 기후가 올해처럼 따뜻한 적은 없었다”고 말 했다. 엘리뇨가 인도네시아에 5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가져왔고 이것이 이번 재앙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방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고무플랜테이션 기업과 벌목기업 1백76개를 수사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환경전문가들도 이번 산림화재가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 열대우림 지역에서 매년 있어온 화전농과 기업의 방화에서 비롯됐고 여기에 엘리뇨 현상이 맞물려 그 규모가 확대됐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 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산림파괴를 일삼아온 인류에 대한 자연의 예정된 보복이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대재앙을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린피스는 26일 지난 91년에도 인도네시아에 서 산불로 20여명이 사망했고 20만명의 주민이 소개된 적이 있었음을 지 적하면서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91년에 발생했던 이 문제를 알 고 있으며 또 다시 발생할 개연성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고 비난했다.
실제 인도네시아의 산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82년∼83년 찾아 온 엘리뇨에 따른 건기에도 농지를 확보하려는 화전민과 고무 플랜테이션 업자들의 방화로 산불이 발생해 3백만ha의 열대우림이 불탔고 칼리마탄 지역 전체가 몇주 동안 거대한 연무에 뒤덮였다. 당시 자연보호를 위한 국제위원회는(IUCN)는 이를 “금세기 최악의 환경재앙”으로 평가했다. 장 폴 말링로 등 환경전문가들도 “이 불은 규모나 강도로 볼 때 전례없 는 생태학적 사건”이라며 “미래에 가뭄의 영향은 더욱 악화될 것이며 황폐화돼가는 숲에서의 반복되는 가뭄과 화재는 원시림 생태계의 회복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대책마련을 경고했다.
하지만 벌목과 화전은 계속됐고 10년 뒤인 91년 10월 건기와 92년 3월에 도 보르네오에 있는 동칼리마탄주 사마린다 지역에서 불이 났다. 대개 2 ∼3일 간격으로 내리는 스콜 등에 의해 자연 진화된 이런 화재로 매년 1 천ha 이상의 열대우림이 불탔다. 이번 화재도 지난 5월께 시작한 화전이 때마침 밀어닥친 엘리뇨 현상으로 3개월 이상 건기가 계속되고 여기에 북 서풍까지 겹쳐 불길이 밀림으로 번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발전 했다.
한가닥 희망 “폭우여 내리소서”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는 불길을 잡기 위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 과 함께 최대 피해지역인 리아우 지역 등에 대한 인공강우를 시도하고 있 다. 하지만 자연의 보복에 맞선 인간의 때늦은 안간힘은 불길을 잡기에 역부족이다. 불이 번진 면적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데다 이들 지역 의 대부분은 수풀 아래 나뭇잎 등 퇴적물이 3m 이상씩 쌓인 피트층이 자 리잡고 있어 땅속의 불씨까지 죽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결국 인도네시아인들은 올 10월 중순께나 찾아올 몬순성 폭우라는 자연의 자비에나 기대고 있는 듯하다. 화마로 잿더미가 된 잠비시의 대변인 푸아 프 M 유수프는 24일 “우리는 다음달에는 연무를 걷어줄 비가 내기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뇨가 내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게 세계 기상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전망이다. 상처받은 대자연의 보복은 그만큼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