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빗자루 인생’ 백양기씨


청소부가 되던 날의 감격

백양기(62)씨의 하루는 얼마 전까지 이렇게 시작했다. 42년 동안 단 한번 도 어겨본 적이 없던 출근시간. 그 사이 세 아들과 두 딸이 어른이 됐고, 아내는 환갑을 눈앞에 둔 할머니가 됐다. 그렇게 출근해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쓰레기통을 비우고 골목을 쓸었 을 뿐이다. 구멍 뚫린 냄비, 깨진 거울, 고장난 텔레비전, 그리고 악취를 풍기는 음식쓰레기. 그런 것들과 평생을 부대끼며 살았다. 지난 6월30일 정년퇴직하기까지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청소를 해온 환경미 화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학교가 집에서 멀기도 했지만 끼 니도 거르는 판에 공부는 호사였다. 6·25 전쟁통에 피난지 부산으로 돈 벌겠다고 떠날 때 어머니는 말없이 주먹밥 세개를 싸주셨다. 영국인 신부 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기대며 일자리를 찾다 구한 게 이른바 미군부대 하 숙보이. 미군들 막사를 돌며 이불을 개주고 깔아주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몸은 고됐지만 먹고 사는 걱정은 없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미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그는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고, 혈혈단신 서울로 뛰어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빗자루를 잡은 게 55년 8월16일이었다. 그때 나이 스무살. 전쟁 직 후라 가뭄에 콩나듯 일자리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환경미화 원은 청소부라 불렸고, 청소업무는 경찰국 위생과 소관이었다. 청소부가 되던 날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한 사흘쯤 굶었을 거예요. 눈 에 뵈는 게 없었으니까요. 식당으로 달려가 국밥을 두그릇이나 먹어치우 고 청소부 월급타서 갚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였죠. 그때서야 겨우 살았 다는 생각이 듭디다.”

용산구 남영동이 첫 일터였다. 지금이야 거리청소가 용역업체로 넘어갔지 만 그땐 언감생심이었다. 30여명의 청소부가 용산구 전체의 거리청소와 동네청소를 도맡았다. 84년께 용산구의 환경미화원이 4백80여명에 이르렀 으니 참 고된 시절을 보낸 셈이다. 처음엔 품삯도 일당으로 받았다. 그때 돈으로 4백원. 한달 내내 일해야 쌀 한가마도 못 팔았다. 새벽같이 일어 나 저녁까지 골목과 거리를 누비는 고역인데도 그랬다. 오죽하면 별보고 나갔다 달보고 들어오는 신세라고 한탄도 했겠는가. 그 덕에 청소를 맡았 던 구역은 부처님 손바닥 보듯 훤하다.

청소라는 게 일년 열두달 편한 날이 별로 없다. 우선 겨울엔 춥고 일이 많다. 집집마다 연탄을 때던 시절엔 골목이고 거리고 할 것 없이 연탄재 로 넘쳤다. 게다가 눈까지 내리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오르막길이 미끄러 워 리어카 끌기가 몇곱절 힘들다. 여름엔 또 비가 골칫거리다. 비가 오면 일단 그날은 쉬지만 그만큼 다음날 일이 쌓이게 마련이다. 김장철엔 배추 며 무 조각이 쌓이고, 이사철엔 잡동사니 살림살이로 골목이 비좁았다. 세월이 흘러 연탄이 사라지고 김장도 조금 하는 세태로 바뀐 게 청소부 입장에선 고맙기만 하다.

(사진/그는 환경미화원의 쥐꼬리 월급으로 42년간 아내와 다섯 자식을 부양했다. 정년퇴직 뒤 집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는 일은 큰 기쁨이다. )

청소부는 위험을 옆에 끼고 산다. 언제 어디서 불쑥 차가 나타나 들이받 을지 모른다. 새벽녘 길에 거칠 게 없다보니 차들이 총알택시처럼 내달리 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광 작업복이 없던 시절엔 차에 치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뺑소니다. 목격자가 없으면 사고를 당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도 그런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어느날 새벽이었 어요. 거리를 쓸고 있는데 차가 옆을 지나치며 빗자루를 건드리는 거예요 . 빗자루가 마치 탁구공처럼 튀어오르더니 입을 때립디다. 앞니가 몽땅 부러지고 말았죠. 그때 이후로 틀니를 끼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사람이 좀 둔한 편이다. 몸뚱이가 유일한 재산인데도 그걸 관리할 줄은 모른다. 위에 큰 탈이 났는데도 우직하게 일을 마치고서야 병원을 찾은 일은 지금도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84년 어느날, 밤새 배가 아팠다. 아침에도 고통이 가시지 않았지만 꾹 참고 일을 마쳤다. 그리고 끝내 실 신. 위궤양이 도져 위에 구멍을 낸 거였다. 동료들에게 업혀 병원에 가니 의사가 참 미련한 사람이라며 혀를 끌끌 차더란다.


직업에 귀천이 정말 없다구요?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청소부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대접받는 직 업은 아니다. 사람들 중에는 드러내놓고 업신여기는 축도 있고, 돌아서서 비웃는 부류도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재건대라 불리던 넝마주이 들이 특히 냉대가 심했다. 서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건만 행패가 대단했다. 쓰레기장을 꿰차고 앉아 청소부들을 하인 다루듯 했다. 그들이 고물을 골라내기 전에 쓰레기를 차에 실을라치면 주먹이 날아왔다. 그래 서 그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청소에도 요령이 있다. 구역마다 리어카가 들어가기도 비좁은 골목이 몇 개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때 무작정 힘으로 대들면 고생만 하기 일쑤 다. 그래서 청소부 신참은 금방 티가 난다. 청소부 일을 몇년 한 고참들 은 거리를 청소할 때 빗자루를 길게 잡고 넓은 반원을 그린다. 그러나 신 참들은 빗자루를 짧게 잡고 좁게 쓴다. 그러면 일도 잘 안 되고 힘만 들 뿐이다. 쓰레기통을 들 때는 역기를 올리듯 순간적으로 힘을 짜내야 한다 . 천천히 들면 무게를 견디기 힘들다. 역시 오랜 세월 몸으로 터득한 지 혜다.

42년 청소부 인생의 결과는 퇴직금 9천여만원과 21평짜리 아파트가 전부 다. 그나마 아파트도 시에서 환경미화원들에게 분양하지 않았더라면 그림 의 떡이었을 것이다. 그의 월급으로 아내와 자식 다섯을 부양하기란 애초 부터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백혈병 진 단을 받은 아내에게 들어가는 약값도 만만찮았다. 20년 넘게 월급에서 아 내 약값을 떼놓고 살림을 꾸렸다. 그래도 자식들이 반듯하게 자라 고마울 뿐이다.

새벽 3시30분. 그는 지금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 시간이 되면 귀신에 홀린듯 눈이 떠진다. 자리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아침을 맞는다 . 아무래도 청소부가 천직이었던 것 같다.

사진 이정용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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