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표지이야기/체 게바라

의사에서 혁명가로, 게바라 격정의 39년

(사진/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게바라는 질병치료보다 세게의 모순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해 안정된 의사직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 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 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이 ‘격정의 60년대 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 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 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 질적으로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 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 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투에서 승리하면 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 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 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해 게 바라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결국 게바라는 67년 10월8일 체포된 뒤 처형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 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왜 인텔리 의사가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 아넣었느냐”는 볼리비아 여인의 질문에 간단히 “나의 이상을 위해”라 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또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게바라가 처형된 뒤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추구한 이상의 실현을 죽어서나마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