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아버지 피만 피가 아니다”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성립·유지라는 헌법정신에 어긋난다. ”

헌법재판소가 지난 7월 동성동본 금혼제도에 대해 사실상 위헌 결정을 내 린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지난 58년 민법이 시행된 뒤로 39년 동안 존폐여부를 둘러싸고 줄기차게 이루어진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동성동본 금혼 조항이 남자쪽 혈족에만 한정하고 있어 성차별을 하고 있 을 뿐 아니라, 남자를 중심으로 한 족벌적·대가족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 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게 헌재의 규정이었다. 부계혈통주의의 인습과 제 도에 ‘철퇴’를 가한 셈이다.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다

한달 뒤 부계혈통주의는 다시 한번 휘청거린다. 중국 국적인 아버지와 북 한 국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아무개(41)씨는 부계혈통주의만 인 정하는 현재의 국적법 조항에 대해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서울고법 특별5부는 이씨의 주장이 ‘이유있다’며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국적취득에 있어 부계혈통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적법 2조1항은 헌법 이 보장한 남녀평등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와중에 법무부는 최근 국적법상의 부계혈통주의를 버리고 양계혈통주의를 인정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한국인인 경우에 만 자녀의 대한민국 국적 취득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어머니나 아버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한국인이면 출생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최근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법률적 사건들은 부계혈통주의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부계혈통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됐다고 할 수 있다. 헌재도 “여성의 사회활동에 눈 부신 변화가 있었고 아들 선호경향이 줄었으며, 독신여성 및 이혼녀가 증 가하는 등 남녀간 평등의식이 고취되고 있다”고 밝혀 이런 변화를 인정 하고 있다. 어찌 보면 헌재의 결정은 사회환경 변화로 사문화된 법적·제 도적 조항에 대해 ‘교통정리’를 한 것에 불과하다.

부계혈통주의가 농경정착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토지 가 재산이고 핵심적인 생산수단이다. 따라서 각 가족은 토지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것이 생계와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된다. 다른 가족이나 사람이 그 경작지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배타적 성격을 갖는 혈 연집단의 형성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농경사회에서는 토지를 잘게 분 배하는 것보다는 대가족을 유지하는 것이 생산력 향상에 유리하고, 가족 원이 중요한 노동을 제공한다는 경제적 이유로 대가족이라는 혈연적 유대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혈연에 기초한 부계혈통주의는 조상의 혈연에 시 간적으로 가까운 장자에게 부업을 승계하고, 또한 차남보다는 장자에게 후계권을 줌으로써 빨리 가업승계를 안정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부계혈통 주의에서 형제관계나 부부관계는 모두 부자관계에 종속돼 버린다.


호주제, 여성계와 유림의 맞섬

반면에 수렵채집사회의 특징은 가족의 ‘유동성’이다. “느슨하고 비영 구적인 유대” 관계 아래서 개인은 핵가족 단위로 자유로이 이동생활을 한다. 어떤 인류학자는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친족개념이 희박하며, 심지어 부계혈통이나 모계혈통 따위의 소속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종족도 있 다고 주장한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사회의 가족유형이 현대산업사회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직업에 따라 생활근거지를 이동해야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핵가족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친족이나 혈 족개념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산업사회의 가족에서 나타나는 ‘유동성’이 우리 사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장남의 독립 거주, 핵가족 형태, 생활기반으로서의 친족공동체 붕괴, 독신녀 이혼녀의 증가와 같은 제반 경제적·사회적 변화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씨, ○○파 따위의 친족개념은 이미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거의 유일하게 부계혈통주 의의 ‘유물’로 남아 있는 민법상의 호주제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의 호주제도는 지난 89년 3차 가족법 개정에서 상당히 개선됐다. 하 지만 현재의 호주제도는 당시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계와 존속을 주 장하는 유림쪽의 주장이 맞서면서 정치권의 타협물로 탄생했다. 상속과 같은 호주의 재산상의 권리와 의무는 모두 폐지해 여성계의 손을 들어주 는 대신, 호주의 사망 등으로 인한 승계순서는 그대로 유지해 유림쪽에는 명분을 준 것이다. 이에 따라 호주승계순위는 호주의 아들→딸→배우자→ 어머니의 순서로, 아들을 1순위로 하는 부계혈통주의의 상징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남편-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의 전통적 여성 관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또한 혼인으로 부부가 새 호적을 만들 때, 무조건 남편을 호주로 하여 편제하도록 돼 있는 방식도 부부평등에 어긋난다고 보고 있 다. 이러한 부계혈통주의에 따라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무조건 아버지 호 적에 입적하게 되고, 입양이나 혼인을 하지 않는 한 다른 호적에 입적할 수 없다. 이혼한 여성이 자식의 친권자가 되어 자식과 같은 호적에 있고 싶어도, 자녀의 호적이 여전히 전 남편의 호적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부부합의로 대표를 정한다?

호적법에 남아 있는 또하나의 불평등 조항은 이른바 ‘혼인 외의 자녀의 입적에 대한 남편의 동의권’이다. 예를 들어 재혼한 여성이 전 남편의 소생인 자녀들을 호적에 이적시킬 때는 현재 남편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 하고 있다. 남편의 혈통이 아닌 자녀는 호적상 ‘주인’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반대로 남편이 재혼을 했을 경우 전처 사이에서 난 자녀는 호적에 올릴 때 재혼한 아내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호주제도 존치론자들은 호주제도가 우리의 전통적 인 정신문화이며 우리 가족제도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호주제도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입각한 미풍양속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폐지론자들은 호주제도가 조선시대 때 봉건토지경제체제와 성리 학을 토대로 한 중국의 종법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한다. 게다가 현재 가정생활은 현실적으로 가구주 내지는 세대주 중심으 로 이뤄지기 때문에 호주와 실제 가장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여성 계의 주장이다.

현재의 호주제도가 여성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부계혈통주의라는 상징성 때문에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여성 계는 주장한다. 김주수(69) 연세대 객원교수는 “호주제도는 실질적인 피 해자가 없기 때문에 위헌제청을 안 해서 그렇지 위헌판결이 날 소지가 상 당히 높다. 헌법에 규정한 양성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한 다. 김 교수는 이에 따라 호주제를 폐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주민등록에 혼 인, 출생, 사망신고 따위를 기재할 수 있도록 일원화하는 방식이 필요하 다고 주장한다. 또 예산문제가 걸린다면 당분간은 일본처럼 부부단위로 호적을 만들어주고, 부부간의 협의로 대표를 정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대 안을 제시한다.


법무부도 ‘호주제 손질’ 의지

부계혈통 위주의 현재의 호주제도가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수명이 오래가지는 않을 성싶다. 호주제도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한번 개정될 것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호주가 갖는 경제적 프리미엄이 전혀 없는 상태다. 게다 가 이제 혈통보존이라는 시대적 명분도 없어진 것 아니냐. 대법원에서 호 주제도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식으로 든지 현재의 호주제도에 대해 손질을 가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어쩌면 21세기의 학자들은 먼지묻은 20세기 법전을 꺼내 놓고 사라진 호주제도 연구를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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