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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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부계혈통주의, 그 가운데 장자가 정통성을 인정받는 ‘적장 자주의’가 완전히 정형화된 것은 18세기 이후 정도라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신라시대의 왕위계승은 아들을 우선했지만 사위와 딸을 배제하지는 않았 다. 신라의 역대왕들 가운데 사위가 왕위계승을 한 경우는 17대 내물왕, 42대 흥덕왕 등 여덟명이나 되고, 딸의 신분으로 계승한 경우도 27대 선 덕왕, 28대 진덕왕, 51대 진성왕 등 세명이나 된다. 철저한 부계원리에 입각해 있다면 아들이 없는 경우 사위나 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지 않고 부계혈연의 양자를 입양하여 계승시켜야 한다. 그러나 신라는 양자제도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신라의 왕위계승은 부계가 우위에 놓이면서도 상당히 융통성을 보인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왕위계승은 원칙적으로는 적장자주의에 입각해 있다. 왕족이 아닌 경우, 법제적으로는 적장자주의에 의거한 듯이 보이지만 제사상속 같은 중요한 승계권을 외손이나 딸에게도 상속시켰던 것이 실제 관행이었 다고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계계승을 목적으로 부계혈통 의 양자를 입향하는 사례는 없었다는 것이다.
초기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노비는 아들과 딸이 살아 있든 죽었든지 균등히 상속한다”고 명시돼 있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 기 중엽까지는 자녀 균등상속이 우세하긴 하지만 장남우대, 아들과 딸 차 별의 자녀 차등상속형태가 출현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는 장남우대·남녀차별의 상속형태가 일반화돼가는 경향을 보이 고 있다.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 봉사자도 17세기 말기까지는 장남봉사방 식과 자녀윤회방식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나 18세기 초부터는 자녀윤회방 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사회는 18세기에 이르러 재산이나 제사 상속에서 장남우대·남녀차별이 완전히 정착됐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엽에 이르러 철저한 부계혈통주의가 정착한 데는 다양한 해석 이 존재한다. 우선 유교의 융성에 따른 조상숭배사상의 강화를 들 수 있 다. 제사를 중요시 여기면서 제사 봉사자의 지위와 재산을 안정시킬 필요 가 생겼고 따라서 불안정한 자녀윤회방식보다는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장 남 단독상속형식이 채택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어수선해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지배계층이 가부장제도라는 통치이데올로기를 강화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