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

그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

집권을 위해선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발상이 빚은 비극을 우리는 자주 경험했다. 5·16이나 5·17 등 군사쿠데타는 물론이고 이승만이 저지른 국회프락치사건,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그리고 3·15부정선거도 오로지 집권만을 겨냥한 정변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3선개헌과 유신 쿠데타도 여기에 포함된다. 지난 87년 6월 6·10항쟁의 불길 속에서 전두 환씨는 이미 선출된 민정당 대통령후보를 물먹이고 재집권을 위한 친위쿠 데타를 시도하려다 포기하기도 했다. 90년의 3당합당을 여기에 포함시키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국민의 선택을 부정했다는 이유에서다.

현 정부는 이런 헌정유린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살아 있는 정변의 주역들 을 사법처리했다. 교과서 속의 각종 정변에 대한 해석도 바로잡으려 했다 .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다. 그것은 집권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건 다 할 수 있다는 발상에 쐐기를 박고자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정치꾼들에겐 내일의 역사적 심판보다 눈앞의 현실적 이해가 앞서 기 마련. 게다가 우리에겐 실패한 정변보다 성공한 정변이 많았다. 아무 리 그렇다기로서니 역사바로세우기의 주체를 자처했던 바로 그 세력들이 역사를 꺼꾸로 세우려는 현실 앞에서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른바 신한국당내 비주류 민주계가 그들이 세운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들 이 선출한 후보를 힘으로 갈아치우려 하는 것이다. 내세우는 이유는 단 하나, 여당 지지율이 낮다는 것이고 그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탈당쪽으로 방향을 잡는 듯하다 요즘엔 2천억원에 이르는 신 한국당 재산이 아까운지 당내투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이들의 지휘부(형식적이든 내용적으로든) 청와대 역시 겉으로는 ‘도울 방법이 없다’고 난처한 기색이지만 실제로는 하루빨리 손을 털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이회창 후보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 니었다. 정체성의 상실, 아들의 병역문제, 정책의 혼선, 의사결정에서의 독선, 비조직적인 행동 등이 교체론자들에게 빌미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 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으로서는 지상명령인 당원의 민주적 선택을 거부 할 빌미가 될 수는 없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인기가 없다고 대통령을 갈아치우거나 대통령후 보를 바꾼 사례를 듣지 못했다. 국제대회에서 대표팀이 질 경우 감독인선 , 선수선발, 훈련 등 모든 꼬투리를 잡아 조지는 언론의 무모함을 자주 보았지만 경기 중 단지 밀린다고 해서 감독 교체를 요구하는 수준의 몰상 식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이 편협한 사람이라도 지난 9월28일 후반전 초반에 한골을 먹었다고 당장 차범근 감독 교체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보교체론자들은, 단지 열세라는 이유만으로 경기 중 선 수들이 경기장을 이탈해 감독의 멱살을 흔들어대는 꼴이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권력의 단맛밖에는 없다는 지적은 그래서 적 절하다. 그들의 대안이란 것도 우선 당선가능성을 기준으로 선별된다. 그 리고 자신과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지가 두번째 기준인 듯하다.

마약중독자는 적어도 마약의 약효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선 타인에게 피 해를 끼치지 않는다. 약효가 떨어지면 광기를 보인다. 권력은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 권력이 지금 그들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 . 이들이 정신을 못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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