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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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원치 않던 무선호출기를 1년 동안 사용할 뻔했던 박숙연씨. 소비자의 무지를 탓하기 이전에 기업들의 적극적인 서비스가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가위 연휴가 지나고 볼일이 있던 동료를 따라 은행에 들어섰던 박숙연( 30·건축설계사)씨에게 반가운 안내광고가 눈에 띄었다. 무선호출기 사용 요금 자동이체 신청을 하면 무선호출 단말기를 무료로 준다는 내용이었다 . 장기간 지방출장을 떠난 남편과의 연락을 위해 무선호출기를 구입하려 던 박씨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통장을 새로 만들고, 무선호출기 가입 신청서를 쓰고, 자동이체 신청서를 쓰고, 가입비 4천4백원을 납부한 뒤 박씨는 무선호출기의 주인이 되었다. 토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사용법도 열심히 익힌 끝에 다시 일터인 광주로 돌아가는 남편의 허리춤에는 예쁜 무선호출기가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월요일 남편의 호출번호를 눌렀던 박씨는 조바심을 떨칠 수 없었다. 몇번이나 무선호출기 번호를 눌렀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이 있겠지…’란 위안으로 스스로를 달래던 박씨에게 남편이 뒤늦게 연락을 해왔다. 무선호출기에 수신가능지 역을 표시하는 작은 안테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새 호출기가 벌써 고장이….’ 그러나 고장은 아니었다. 이동통신 대리 점의 설명은 간단했다. 무료로 제공하는 무선호출기는 광역서비스가 안 되고 광역서비스를 받으려면 별도의 호출기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청서 부가서비스 난에 광역서비스를 표시하면 당연히 광역서비스도 되 는 줄 알았던 박씨는 황당했다. 지방에 내려가 있는 남편과의 원활한 연 락이 주목적이었던 박씨에게 광역서비스가 안되는 무선호출기는 필요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입해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동통신 대리점의 이야기는 박씨를 더욱 황당하게 했다. 1년 동안 해지를 할 수 없다는 거였다. 1년의 가입기간이 지나야 무료로 제공한 무선호출기 값이 보상이 된다는 설명이었지만, 안 내문이나 신청서 어디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던 대리점의 해지 불가 주장 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신청서에 광역서비스 난은 지웠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부클럽연합회 소비자보호부에 전화를 걸었다. 박씨와 같은 피해사례가 많다는 말과 듣도 보도 못한 ‘1년 동안 해지할 수 없다’는 내용의 약정 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용증명 우편을 보내고, 신청서를 복사하고… . 상담원이 알려주는 준비해야 될 서류가 너무나 많았다.
은행을 다시 찾았다. 자동이체라도 취소할 요량이었다. 이동통신에 가입 해지를 했느냐고 묻는 은행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무선호출기를 받 는 것과 가입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고 이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시 간이 걸리더라도 법적 조치를 다하겠다는 각오까지 밝혔다.
담당 은행원이 대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박씨가 들었던 설명이 되풀이되 는 것 같았다. 은행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표정이 밝아 졌다. 해결이 됐다는 거였다. 자동이체 신청을 취소하고 가입비로 냈던 4 천4백원 가운데 그날까지의 무선호출기 사용료가 공제된 2천몇백원이 박 씨에게 돌아왔다.
법정소송의 번거로움이 사라졌지만 마음 한구석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 다. 그 무선호출기가 남에게 넘어가 명의는 자신에게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호출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풀리지 않기 때문 이다. 박씨는 이 의심을 떨치기 위해 또 한번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생 각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란 교훈을 되새기며….
윤승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