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작은 정성 큰 기쁨

“수첩 보내고 청심환 받았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나보다. 이혜연(37)씨는 지난해 이맘때쯤 낯선, 그러나 뜻깊은 체험을 했다. 시댁에서 추석을 보내고 며칠을 머물 다가 고속버스편으로 올라와 지하철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보따리를 챙겨들고 힘겹게 교대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먼발 치의 의자에 있는 붉은 색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막차가 들어올 시 각이라 환승객도 그렇게 붐비지 않아 이씨가 그 의자에 이를 때까지 그대 로 있었다. 그것은 지갑이 아니라 작은 시스템 다이어리였다.

“지퍼가 열려 있고 내용물은 마구 뒤진 흔적이 있었어요. 자동차 운전면 허증과 각종 외국 신용카드가 들어 있는 수첩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 섞여 있었는데 그렇게 정리가 잘 된 기록은 처음 보았습니다.” 늦은 시 각에 보따리를 들고 유실물보관센터를 찾기도 사나워 보따리 어딘가에 넣 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짐을 풀어놓으며 김씨는 깜짝 놀랐다. 그때 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겐 아무 쓸 데 없는 물건이지만 당사자에겐 더없이 소중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연락처를 찾아보았어요. 한참을 뒤져 꼭꼭 숨어있던 당사자의 연락처를 발견했어요.”

일본인 여성이 다이어리의 주인이었다. 한국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것으로 보아 국제결혼을 한 여성으로 보였다. 경남 창원으로 급히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저녘에 연락을 한다는 게 무려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말에 서투른 여성이 수화기를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편은 얼마전 서울 에 갔다가 잃어버린 소중한 다이어리라고 말했다. 연락처를 가르쳐주고 바로 보내드리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소포로 포장해 보내려면 우 체국에 가야 했는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쯤 뒤 일본인 여성의 남 편의 전화를 받고나서야 우체국에 가 다이어리를 보냈다.

그리고 보름여가 지났을 때였다. 우체부 아저씨가 도장을 가지고 나와 소 포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소포는 일본인 여성의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내용물은 감사의 편지와 우황청심환 10정이었다. “사소한 일로 지나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쑥스러웠죠. 바로 전하지 못해 미안했는데 따뜻 한 정성이니 고맙게 받아 천식으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니께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감사히 받았다는 연락을 이제껏 하지 못했어요.” 감동은 그렇게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 사이에 소리없이 흐르나 보다.

김수병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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