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노년에 살어리랏다

(사진/노인보호사업소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노인들의 일상에 활력이 샘솟고 있다. 노인들은 무료 침술과 부황 등으로 건강을 돌보기도 한다.)

“집에 있을 때는 교회다니는 일로 소일했는데 여기 매일 나오면서부터는 교회갈 시간이 없어. 나와서 친구들도 사귀고 취미생활도 하니까 이보다 좋은 게 없지.”

9월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 낡은 3층 건물 밖은 가을을 재촉하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3층에 마련 된 20평 남짓한 노인보호사업소(주간) 안은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벽면에 가지런히 나붙은 그림과 종이로 접은 공예품들이 할머니들의 솜씨 를 자랑하고 있다.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탁자에는 할머니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색종이를 이용한 꽃 그림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색종이를 오려 바탕 그림에 옮겨 붙이는 미술시간이다. 할머니들의 얼굴은 마치 유치원생들처럼 환하다. 탁자 위에는 색종이와 크레파스, 가위, 풀 등이 놓여 있다. 눈은 침침하 고 손놀림은 더디지만 한손 한손 정성이 갈 때마다 색종이들은 예쁜 꽃으 로 다시 피어난다.

이 노인보호사업소는 노인 단독세대 및 맞벌이 부부의 증가에 따라 집에 서 가족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노인을 대상으로 낮동안 보호사업을 펼치 고 있다. 노인 혼자 살림을 꾸려가거나, 가족이 있지만 형편상 제대로 돌 봐줄 사람이 없는 거동불편 노인들이 찾아와 삶의 활력을 찾는 곳이다.


보호 못받는 노인들의 안식처

올해 86세인 김순이 할머니는 신수동 집에서 이곳까지 매일 노인복지센터 에서 운영하는 승합차를 타고 ‘출퇴근’한다. 여기 나온지 벌써 6개월째 다. 외손자 부부 및 증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생활보호대상 자로 지정돼 무료로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얼마전까지만 해 도 경기도의 한 양로원으로 옮길까 생각도 했다. “정부에서 먹을 것 정 도는 보태주지만 외손자 내외에게 10년 가까이 얹혀 살아 너무 미안한 마 음이 들어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접었다. 주간 노인보호사업 소가 있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색종이를 이용해 꽃을 만들어 붙이는 일이 큰 낙이자 특기이 다. 젊었을 때는 수를 잘 놓기로 소문이 났을 정도로 수놓는 일에는 자신 이 있다. 할머니가 오려 만든 종이꽃은 며칠 뒤 이곳 할머니들이 만든 공 예품 전시회에 내걸릴 예정이다. 아직은 크게 불편한 데는 없지만 월요일 과 금요일에 있는 무료 침술도 가끔 받는다.

“아직은 몸에 큰 탈이 없는 게 다행이야. 집에 있을 때는 늙은이가 뭐 할일이 있겠어. 예배당 나가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지. 그런데 여기서 는 차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고, 친구도 사귀고 또 좋아하는 꽃 만들기 도 함께 할 수 있어 좋아.”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이 운영하는 이 사업소는 지난 4월1일 문을 열 었다. 현재 약 1백여명의 노인들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는데 하루 평균 20 여명의 노인들이 매일 이곳을 찾아온다. 생활보호대상 노인들은 전액 무 료이며, 일반 노인들에게는 하루에 3천원을 받는다. 주로 인근지역 노인 들이지만 조금 먼 동네에 사는 노인들을 위해서 오전과 오후 승합차를 운 영하고 있다.

복지센터 건물 안에는 1,2층에 경로의원이 있고 3층에는 경로식당이 있어 , 의료서비스 외에도 무료 점심제공을 받을 수 있다. 경로의원에는 매일 인근 지역의 저소득층 노인 1백여명이 무료 진료를 받으려 오며, 구청 보 조와 법인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경로식당은 매일 1백50명의 노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되는 주간 보호사업은 요일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체조 및 일상동작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침술서비스가 있다. 이외에 미술시간, 한글교실, 치 료 레크레이션, 노래방, 목욕 및 이미용 서비스 등이 실시된다. 프로그램 이 정해져 있지만 내키지 않으면 자유롭게 담요를 깔고 앉아 화투놀이를 하거나 세상사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평균 3∼4명씩 찾는 할아버지들 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할머니들의 화투판에 끼기도 한다.

이곳에서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사회복지사 황을선(24)씨는 “종이접기, 그림그리기, 화투놀이 등은 손과 두뇌를 활발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무 료한 시간을 보내는 놀이로서 뿐만 아니라 신체기능 유지와 치매예방 효 과도 크다”고 말했다


무료 침술 서비스 가장 인기 모아

이들 프로그램 중에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역시 침술 서비스다. 하루 평균 20여명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업소를 찾지만 침술서비스가 있는 월 요일과 금요일에는 30여명이 넘게 몰린다. 그만큼 노인들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크기 때문이다. 전문 침술인인 김배홍(63)씨가 일주일에 두 번씩 무료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뇌졸중으로 왼쪽팔다리가 불편한 정옥주(66) 할머니는 주간보호사업이 시 작되기 이전부터 경로의원에 다녔다.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으로 매달 나 오는 9만∼9만5천원으로 근처 월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정 할머니는 경 로의원의 물리치료와 주간보호사업소의 침술을 받고 상태가 많이 나아졌 다. 할머니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은 데다 굳은 일을 도맡아 ‘새댁’ 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정 할머니는 “이곳에 나오면서 마음이 편하다 보 니 몸도 금방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홍경유(82) 할어버지도 왼쪽다리가 몹시 저려 경로의원을 찾았다가 이 사 업소 침술서비스의 단골이 됐다. 홍 할아버지는 2주 전부터 침술서비스가 있는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정릉에서 지하철을 타고 먼길을 찾아온다.

침술, 미술시간과 함께 요즘은 치료 레크레이션도 인기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대학생 등 레크레이션 자격증이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풍선터뜨리 기, 과일따먹기, 박수치기 게임 등을 벌인다. 이런 활동은 적당한 신체 운동을 유도해 혈액순환을 증진시키고 치매나 중풍 등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야외 나들이나 함께 차리는 생일잔치 등도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한다. 이곳 노인들은 30일 포천의 한 온천으로 단체 온천욕을 떠나기로 했으며, 노인의 날인 10월2일에는 경로식당에서 노인잔치를 열 계획이다.

그러나 물리치료나 점심제공 이외에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게 가장 큰 힘 이 되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벗을 만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과 질병뿐 아니라 외로움과 무력감이 큰 적인 노인들에게는 이런 유대감이 심리적 안정과 삶의 활력을 되찾는 디딤돌 구실을 한다. 한 할머니는 “집에서 우두커니 않아 있지 않아도 돼 좋다. 따뜻한 밥을 여럿이 함께 먹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노인복지 차원서 예산 확충 절실하다

재가노인복지센터 최재식 시설장은 “주간 보호사업을 경로당쯤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면서 “노인들이 모여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뿐 아니라 의료 상담, 취미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노 인의 생활안정과 심신기능의 유지·향상을 돕고 부양가족의 신체적 정신 적 부담을 덜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 시설장은 또 “주 간보호사업과 관련해 주로 단체생활이 어려운 치매 노인들에 대한 보호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면서 “치매 노인을 위한 시설이나 인력 여건이 안돼 이런 중증 환자들에 대해 서비스를 실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고 밝혔다.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는 주간보호사업 예산 가운데 80%를 구청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나머지 20%를 법인에서 부담하고 있다. 하루 몇명이 내는 이용료 3천원은 간식비 등 자잘한 운영비로 충당될 뿐 이다.

현재 각 자치단체에서는 이런 주간 재가노인 보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서 울시의 경우 18곳에서 이런 서비스를 실시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런 시설이 태부족한 게 현실이다. 서울시 노인복지계의 한 관계자는 “앞으 로 재가노인을 위한 시설을 더욱 늘릴 계획이지만 예산 확보 등에 어려움 이 있다”고 말하고 “어린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보육시설 등과 달리 저 소득층 노인을 대상으로 한 시설의 경우 이용료를 현실화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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