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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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트리스 웹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노동조합운 동사>를 쓴 웹 부부라고 하면 알아차릴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 그 웹 부부의 한쪽인 비어트리스 웹은 남편 시드니 웹과 함께 페이비언협회의 중심인물로 오늘의 영국 노동당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여성이다. 얼마 전 , 보수당을 물리치고 만 20년 만에 집권한 노동당은 페이비언협회의 이념 을 그 중요한 모태로 삼고 있다.
페이비언협회는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 의와 달리 점진적 변화와 개인의 의식변화를 추구한다. “페이비언협회 제1의 성과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마력을 분쇄한 것”이라고 역사가 에드워드 피스는 말했다. 그만큼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영국만의 독특한 것으로, 현재의 영국을 이해하는 데 몰라서는 안 될 요소다.
1858년 부유한 사업가의 9녀1남 중 8번째로 태어난 비어트리스는 몹시 병 약해서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지원 아래 폭넓은 독서 로 지식을 넓혔다. 당시 영국 중산층 사람들은 사회봉사나 자선활동을 일 종의 명예와 의무로 생각했다. 비어트리스도 그런 생각으로 5년간 자선조 직협회에 몸담았고,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이 다.
사촌형부 찰스 부스를 도와 런던 동부의 부두 노동자, 봉제 노동자들의 빈곤실태조사에 참여한 비어트리스는 짧은 동안이지만 난생 처음 노동을 직접 경험했다. 간단한 집안일까지 모두 하녀가 도맡아 해주는 부유한 가 정에서 자란 그가 바지 담당 여공으로 취업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어떻 게 땀을 흘리는가’를 직접 체험해본 그는 자신의 체험을 <어느 여공의 일기>란 제목으로 발표하고, 상원 특별위원회에 나가 증언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복지와 자유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비어트리스는 소비자협동조합과 노동조합에 대해 조사·연구하기 시작 했고, 그 무렵 페이비언협회 회원인 시드니 웹과 만났다. 빠른 속도로 가 까워진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1+1은 2가 아니라 11입니다.” 시드니는 비어트리스에게 청혼하며 이렇 게 말했다. 결혼과 함께 비어트리스는 페이비언협회에 가입한다. 두 사람 은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자신과 결혼생활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약속했다. 비어트리스에게 매년 1천파운드 정도의 수 입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돈 걱정없이 마음껏 원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04년 최초의 공동작품인 <노동조합운동사>가 출간되고, 그뒤 5 0여년간 두 사람은 페이비언협회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며 수십권의 저서 를 공동연구, 공동집필한다. 1+1=11의 결혼생활을 실천한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비어트리스의 자서전 <우리의 협동시대>에 잘 묘사 되어 있다. 스스로 협동생활이라 표현한 그대로 비어트리스는 남편과 함 께 연구·집필·사회활동으로 꽉찬 일생을 살았다. 사소한 문제로 소모적 인 고민을 하거나 여자란 이유로 특별히 고통받은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 는다. 그래서인지 비어트리스는 당대의 여성운동가들과는 오히려 소원한 편이었고 남성들과 함께 일하기를 더 즐겼다.
1939년 무렵, 비어트리스는 페이비언협회 회장이 되고, 시드니는 패스필 드 경이란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비어트리스는 패스필드 부인이라 불리 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냥 비어트리스 웹이 좋다면서. 두 사람은 죽어 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함께 묻혔다. 부부가 함께 묻힌 건 이 사원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