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현대 제철소 OK”

김만제 포항제철 회장은 지난 9월22일 포철 임원들과의 커피타임에서 현 대그룹의 제철업 진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현대가 제철업 진 출을 시도할 때마다 포철의 독점에 따른 문제점을 사업진출의 명분으로 거론해 왔으나 앞으로는 이 논쟁에 관여돼 포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을 원치 않는다.” 한마디로 현대의 제철사업 추진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의 이런 뜻은 다음날인 23일 포철의 윤석만 홍보담당 상 무를 통해 현대그룹 고위 임원에 직접 전달됐다.


제철업 진출 결정적 장애물 사라져

포철의 이런 태도는 현대의 제철사업 추진을 둘러싼 주변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포철은 그동안 명시적으로 현대의 제철사업 추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적은 없지만 내막적으로는 부정적 태도를 견지해 왔다. 사실 정부의 현대 제철소 불가 방침에 과잉공급 우려라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이 포철이다. 포철의 입장 변경으로 현대는 제철업 진출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하나 사라진 셈이다. 이 는 특히 최근 정몽구 회장이 제철사업 재추진 의사를 공식화한 시점에서 나와 현대를 더욱 고무시키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 9월11일 한국 국제정 상회의에서 ‘한국경제의 성장 잠재력’이라는 연설을 통해 “고로 제철 업에 진출해 포스코(포철)와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한국 고급 철강소재의 경쟁력 제고에 힘쓰겠다”고 천명했다.

전기로가 아닌 고로 형태의 제철사업 진출은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인 지 난 70년대 말부터 추진해 온 현대의 숙원사업이다. 지난해 11월에는 현대 가 사업계획서를 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통상산업부가 공업발전심의회를 열어 “현대 제철소 건설 불가” 결정을 내림으로써 쓴잔을 마셨다. 그러 나 그동안 현대는 경남 하동 등 1∼2곳을 제철소가 들어설 후보지로 저울 질하면서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현대 제철소 유치 여론이 확산 되도록 물밑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포철의 진의 파악에 나서는 등 당황해 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기 존방침 고수 입장을 보이고 있다. 통산부의 고위 간부는 “그동안 포철이 반대한다고 해서 정부가 현대를 막았던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통산부 실무자들도 사석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잉공급 우려라는 반대 명분이 더이상 설 땅을 잃고 있다. 정부는 오는 2000년 국내 철강재 수요를 내수와 수출을 포함해 5천1백70 만t(조강 기준)이라고 제시했으나 철강협회 자료만 보더라도 올해 수요량 이 이미 5천1백63만t이다. 또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2000년도 예 상 수요를 6천1백69만t으로, 공급부족이 1천2백43만t에 이를 것으로 전망 하고 있다. 2005년에는 공급부족이 3천만t에 육박한다.

또 동아시아 시장은 이보다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예측기관인 WEFA는 오는 2000년 아시아 철강시장의 생산은 2억4천5백 만t, 소비는 2억9천7백만t으로 5천2백만t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에 대해 현대는 “고로 증설을 서두르지 않으면 유휴설비가 많은 일본이 아시아 철강시장을 선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포철도 더이상 수급전망을 가지고 신규 제철소 건설에 반대하는 것은 명 분이 약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국내 핫코일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포 철로서는 공급부족이 현실화될 경우 그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는 위험도 느끼고 있다. 권력교체기 때 외풍을 심하게 타는 포철로서는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철강 독점체제 문제점이 자꾸 거론되면서 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정부로서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기아사태 등 에서 시장원리에 따른 처리를 앵무새처럼 주장해 온 현 강경식 경제팀으 로서는 민간기업의 제철소 건설을 반대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다.

그러나 현대의 제철소 문제가 현 정권 아래에서 매듭지어질 것으로 자신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보철강 인수 의사를 밝혔던 포철이 최근 들어 발을 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철은 사실상 현대에 한보 인수를 떠 넘기려 하고 있다. 정부도 내부적으로는 포철이 나자빠지는 상황에서 한 보 처리는 현대 인수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대, 한보와는 다른 고로방식 고집

현대에서는 정부의 생각을 잘 읽고 있는 포철이 현대 제철소 건설 허용과 한보 인수를 한 묶음으로 한 카드로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포철은 동국제강과 컨소시엄을 이뤄 자산인수 방식으로 2조 원의 가격에 한보철강을 인수하겠다는 의향서를 제출했지만 채권은행단과 의 협상에 진전이 없다. 57개 금융기관의 7조원을 넘는 채권과 포철이 제 시한 인수가격 사이에 큰 차가 있는 데다 채권은행단 내부이견까지 겹쳐 협상타결 가능성은 희박하다. 포철의 한 간부는 “2조원 이상의 부담은 불가능한 만큼 현대가 제철업 진출의 프리미엄 성격으로 한보를 인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통산부의 고위 간부도 “솔직히 한보 공개입 찰 때 현대가 한보 인수 의사를 밝혀 오기를 기대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는 제철사업 추진을 위해 한보를 인수할 수는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현대의 한 고위 임원은 “한보의 코렉스와 미니밀 방식은 경제 성을 갖추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현대는 그 대신 철강협회 산하 민 간설비투자조정위원회 등을 통해 국내 철강산업에 관한 공청회를 열어 고 로 제철소 신규 건설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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