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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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말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 과로 연초 한달에 걸친 총파업이 벌어진 지 아홉달 만에 총파업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 대기업의 연쇄부도사태로 가뜩이나 고용사정이 불안정 한 상황에서 근로자파견법 제정 방침, 퇴직금 우선변제 헌법불합치 판정, 정리해고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노동부의 행정해석 등 일련의 조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도산 책임 노동자에게 떠넘기지 말라
기아자동차를 법정관리로 몰고갈 경우 파업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위원장 이재승)은 채권단이 정부의 압력으로 사실상 의 화의신청을 거부하자 9월29일부터 30일까지 시한부 파업을 시작으로 직접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가 기아를 무리하게 제3자 인수로 몰고감 으로써 해고의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기아차 파업이 전면파업으로 확산될 경우 부품업체 노조도 자동적으로 파업에 가세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등 기아그룹 계열사 8개 노조는 29일부터 조합원총회를 잇따 라 열고 파업동참을 결의할 방침이다. 현대·대우자동차 등 완성차업체 노조가 소속된 자동차연맹은 동조파업 방침을 밝히고, 이미 9월25일부터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민주금속연맹과 현총련도 성명 을 통해 “기아사태에 대한 정부의 조치는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와 경제정 책에서 비롯된 기업도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려는 것”이라며 기 아문제의 올바른 해결과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
민주노총은 27일 오후 서울 종묘공원에서 소속 조합원 4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고용안정쟁취와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총파업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민주노총은 이미 산하 조 합에 9월 말까지 파업찬반투표를 벌이도록 지침을 내렸으며, 10월 초부터 지도부가 농성에 들어가 투쟁의 수위를 높인 뒤 11월9일 전국노동자대회 까지 파업의 강도를 점차 높여갈 방침이다. 한국노총 역시 9월24일 경기 지역 노동자집회, 27일 부산과 광주 집회에 이어 각 정당 대표 및 대선후 보들과의 간담회를 열어가면서 11월2일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리는 전국 노동자대회까지 노동계의 목소리를 집결해갈 방침이어서, 민주노총의 투 쟁에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의 이같은 움직임은 무엇보다 정부가 경제회생을 내세우면서, 노동 자들을 그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 조항 가운데 가장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정 리해고를 사실상 합법화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가 응축된 결과 다.
정부와 금융권은 지난 9월1일 부도유예협약 요건을 개정하면서 협약 적용 의 전제조건으로 인원 감축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기 업회생의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해고를 담보로 삼은 것이다. 노동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리해고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노동부 는 9월26일 한영애 의원(민주당)등이 요구한 국정감사 자료에서 “정리해 고의 요건과 절차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31조가 부칙 제2조에 의해 2년 동 안 시행이 유보됐지만, 해고의 정당성을 규정한 30조는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30조에 의한 정리해고는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리해고조항의 적 용이 유예됐더라도 판례가 인정하는 “긴박한 경영상의 사유, 해고회피 노력, 공정한 기준 및 대상자 선정, 노조 및 근로자대표와의 협의 등 정 당한 요건과 절차만 갖추면 지금이라도 정리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와 관련해 즉각 성명을 내고, “개정 근로기준법이 정리해 고의 절차와 요건을 규정한 것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리해고를 규제하자는 취지였다”면서 “노동부의 행정해석은 입법취지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경영계에 치우친 해석”이라고 반발했다. 민주노총도 “노동부 의 해석은 연초 한달간의 총파업과 범국민적 투쟁을 통해 그나마 2년 유 예시킨 정리해고제를 부활하려는 음모”라면서 이같은 행정해석을 즉각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퇴직금 우선변제기간 입법화 과정에서 정부가 형식적으로만 협상을 이끌 다 공익안 밀어붙이기로 나오고 있는 것도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노동계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퇴직금은 생계의 마지막 보루”라면서, 퇴직금 우선변제기간을 사실상 3년으로 제 한하려는 정부 조처에 강력 반발해, 전액변제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 연월차 수당과 유급 생리휴가 폐지기도 및 지난 9월14일 통일중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도 노동계를 자극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밀리다가는 ‘경제살리기’란 명분 아래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무차 별 유린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난국 헤쳐갈 유일한 방안
노동계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이 아닌 경제민주 화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벌경제체제를 먼저 수술함으로써 위기를 헤쳐나가라는 주문이다. 잉여인력 문제도 해고 보다는 노동시간의 단축 등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경 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필요하긴 하지만, 지나치 게 추진속도가 빠를 경우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 오히려 경제살리기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고비용 저효율”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보고, 무엇보다 임금 비용의 감축을 통한 경제회생을 강조하는 정부가 정책의 기조를 바꿀 조짐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총은 현재 총파업의 시기와 파업방식에 대해서는 전권을 권영길 위 원장에게 일임해둔 상태다. 가뜩이나 경기가 침체된 상황이라 노동계가 총파업을 강행하기엔 부담스런 것도 사실이다. 검찰도 불법파업에 대한 사법처리 방침을 천명했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에 따라서는 대선정국에서 노동계의 총파업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 노동계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9일 제 1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