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대중음악

가을 여자들이 유혹한다

이정엽/대중음악평론가


(사진/왼쪽부터 장필순 이은미 장혜진씨)

최근 신문이나 잡지에서 대중가요계를 진단하는 말은 ‘가을바람이 솔솔 분다’ 아니면 ‘성인음악이 제철을 만나다’이다. 조용필, 이선희 등 80 년대 슈퍼스타들이 음반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발매한 음반의 재홍보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계절에 따라 음악스타일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불문율이다.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진 않지만 어쨌 든 중요한 상징체계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추억 속 사랑을 정갈하게 되새겨

가을은 과거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계절인가보다. 이연실의 <가을편지>,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 고은희·이정란의 <사랑해요>, 방미의 <올 가 을엔 사랑할거야>, 이동원의 <이별노래>…. 이런 분위기 있는 노래들이 가을과 함께 해왔고, 이런 가을노래들이 들려올 때면 옷깃을 여미고 낙엽 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계절의 진수를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괜히 잘 듣지 않던 클래식이나 재즈 음반을 틀어보기 도 한다. 그러고 보니 방금 언급한 곡들 대부분이 여자가수들이 부른 곡 들이다. 남자의 계절에 여자의 유혹이라….

올 가을도 예외는 아니다. 장혜진, 이은미, 장필순. 이들은 참∼ 노래를 잘 불러 일단 삐딱한 시선을 거두게 만든다. 장혜진과 이은미가 부른 실 연(失戀) 발라드는 ‘토치 송’(Torch Song)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 토치 송이란 실연이나 이별 등의 내용을 담은 감상적인 곡이다. 그 노 래 속에서 남자는 못된 존재다. 남자란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쉽게 떠나 버린다. 그래서 장혜진은 “왜 그랬나요/이렇게 끝날 사랑을/ 그대는 알 면서 왜”(<왜?>)라고 노래한다. 반면 여자는 떠난 남자를 미워하지 않고 “힘겨웠던 지난날에/ 그 아픈 기억들/ 내 소중한 사랑”(이은미, <이해 할께>)을 잊으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이들 노래의 주제는 현재적 사랑과 이별이 아니라 추억으로 존 재하는 과거의 사랑과 이별이다. 따라서 이들 노래는 30대의 연륜을 보여 주듯 헤어나올 수 없는 비탄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는다. 최정상급 작사 ·작곡가와 세션맨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곡 위에 얹힌 정갈하게 다듬어 진 목소리는 마구잡이로 폭발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언제든 현실로 돌아 올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장필순은 토치 싱어라기보다는 연약한 소녀 의 이미지를 가진 포크 가수다. 포크 가수들은 곧잘 자연, 어머니 혹은 누나에 비유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포크 가수들은 다 이런 어머니 대자 연(Mother Nature)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존 바에즈, 조니 미첼, 양희 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다른 팝 가수들보다 더 무성적(asexual)이었 다. 조금 더 개인적인 관심사를 노래했던 70년대 싱어송라이터들도 이런 부동의 이미지를 크게 건드리지는 않았다. 장필순은 이런 포크 가수나 싱 어송라이터의 범주에 속하지만 자연이나 어머니처럼 위대하거나 강한 이 미지를 갖진 않는다. 하지만 안개낀 도시의 길가에 서있는 언니 혹은 여 동생 같은 그의 모습 역시 일관되게 무성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도록 해준 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별) 노래마저도 도시의 일상적 서정이 담긴 노래 들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의 노래는 절박한 감정을 호소하지 않으며 카타르시스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모든 감정과 상념들은 “사랑해봐도/ 우리 외로운건/ 어쩔 수 없지”(<사랑해봐도>)라는 소녀의 외로움을 노래 하는 파스텔 색채의 차분한 목소리 속으로 용해된다.


거친 감정도 차분한 목소리에 용해

괜한 트집잡기일지도 모르지만 가을노래를 듣다보면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흐름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에 따른 인위적 과정이라는 생각 이 들어 좀 찜찜하다. 추억과 감상, 외로움에 젖는 것조차도 정해진 시간 표에 맞춰 이뤄진다고 말하면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소 리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대중음악이 산업생산물(혹은 산업폐기물)이고 공산품인 것은 움직 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工産主義者)가 아닌 사람들, 즉 ‘올 가을엔 사랑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그만 덧없이 가을을 흘러보 내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음악을 들어야 할까?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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