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잔치, 가을을 덮는다

영화제 홍수다. 부천영화제의 흥이 채 가시지 않았고, 레즈비언·게이영 화제인 ‘퀴어영화제’의 무산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굵직굵직한 영화 제들이 깊어가는 가을, 영화팬들을 기다린다. 지난해 이후 갑자기 늘어난 온갖 영화제들이 때론 분에 넘치는 겉치레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없진 않 지만, 아직까진 오만한 눈흘기기보단 따뜻한 시선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 특히 영화제를 겨눈 심의의 발톱이 여전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제2회 인권영화제(9.27∼10.4, 서울)

올 가을 큰 영화제 속에 자그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윗처럼, 어 린왕자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제다. 인권운동사랑방·홍익대총학생회 주관, 한겨레신문·기독교방송 협찬이다. 인권영화제는 시민에 의한, 시 민을 위한 영화제를 지향하는 철저한 비영리 영화제로 무료개방된다. 대 신 개인 1구좌 1만원, 단체 1구좌 5만원의 후원자를 모집한다. 지난해처 럼 지방에서도 열린다.

올해 소개될 작품은 24편. 그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11년간 추적한 9시 간30분짜리 대작 다큐멘타리 <쇼아>(1985·프랑스, 3회에 걸쳐 상영), 50 년대 대만을 휩쓴 정치테러를 90년대 젊은 여인을 통해 비춰본 허우샤오 시엔 감독의 <호남호녀>(1995·대만),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굶주림에 시 달리던 일본군들이 인육을 먹은 사실을 폭로, 일본에서 20주간 상영된 베 를린영화제 수상작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1986·일본) 등이 먼저 눈 길을 끈다.

소수민족 인권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리고베르 타 멘추의 투쟁을 극화해 과테말라 마야부족 학살을 그린 <퓨마의 딸>(19 94·과테말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갈 릴리에서의 결혼>(1987·프랑스, 팔레스타인),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 너온 쿠바인들이 겪는 고난을 담은 <어떤 쿠바 난민들>(1994·쿠바) 등을 비켜갈 순 없다.

그리고 어린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더 용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라이베리아 내전에 병사로 내몰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히틀러와 아 브라함>(프랑스), 80년대 모잠비크와 앙골라 내전을 겪은 어린이들의 비 참한 유년을 다룬 <눈물의 사슬>(영국), 50만명이 숨진 르완다 내전의 실 상 <르완다 대학살>(1996, 캐나다), 유고내전에서 보스니아 여성에게 가 해진 조직적 성적학대를 담은 제1회 인권영화제 앙코르작 <유령을 부르며 >(1995·미국) 등 전쟁 다큐멘터리 등도 보는 이를 아프게 한다. 지난한 우리 현대사를 다룬 한국영화로는 87년 6월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담은 <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제주 4·3항쟁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199 6), 여균동 감독과 배우 윤동환이 민가협의 제안으로 양심수를 위한 행사 에 상영하기 위해 제작한 <외투>(1996), 양심수 자녀들이 그린 그림을 애 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사랑해요>(1997) 등이다.

이외에도 공산주의 태동과 전성, 그리고 몰락기를 살아온 러시아 할머니 들의 이야기 <바이바이 바브시카>(1996·미국), 게이활동가 하비 밀크의 일대기 <하비 밀크의 시대>(1984·미국) 등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힘들다. 사전심의 거부로 인한 외부압력이 만만치 않다. 서준식 인권영화제 진행위원장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태로든 예정대로 치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을 가르치기 위한 치열한 ‘운동’인 인권영화제의 개최과정 자체가 하나의 인권영화제 소재인 셈 이다. 제2회 인권영화제를 보고싶은 사람, 보아야 할 사람은 매우 많다(0 2-741-2407).

제35회 대종상 영화축제(9.27∼10.4, 무주)

해마다 수상작 선정과정에 물의를 빚었던 대종상 영화제가 올해부터 단순 시상식에서 탈피, 일반 관객이 참여하는 문화축제로 열린다. 한국영화인 협회와 무주리조트 공동주최로 앞으로 10년 동안 대종상 영화제는 무주리 조트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영화제는 관계자들의 본선심사와 별도로 일반공개 심사도 있다. 감독과 출연진이 참석해 관객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관객들이 인기연기자를 직접 뽑는다. 이외에도 유명 영화배우 남녀 각 15명이 직접 패션쇼의 모 델로 출연하는 패션쇼, 신인배우 선발대회, 영화 포스터 및 스틸사진전, 영화캠프, 애니메이션 영화축제 등 부대행사가 풍성하다. 전주 피카디리 극장에서 열리는 한국영화 회고전에선 <연산군> <토지> <자녀목> <개벽> <사람의 아들> 등 대종상 역대 수상작 5편을 상영한다(02-515-4565).

제42회 아·태 영화제(10.6∼9, 제주)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가진 경쟁영화제가 올해 제주에서 열린 다. 14개국(도시)에서 55편이 출품, 최우수작품상과 남녀 주연상 등을 놓 고 경합을 벌이는데 제주시내 극장에서 출품작들이 상영된다. 아·태 영 화제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홍콩 등 14개 회원국(북한·러시아·중국은 옵서버국)들이 돌아가면서 개최해왔다 . 서울에서는 92년 37회 영화제가 열렸으며 지난해 뉴질랜드에서 열린 41 회 영화제에서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문성 근), 여우조연상(이영란)을 휩쓴 바 있다(02-285-4922).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10.10∼18, 부산)

18만명. 광복동과 남포동을 메운 영화인 물결, 광안리와 해운대 해변에서 밤을 새우며 나눴던 영화 이야기들. 올해도 재현된다. 33개국 1백67편. ‘아시아영화의 창’, ‘새로운 물결’, ‘와이드 앵글’, ‘월드 시네마 ’, ‘코리안 파노라마’, ‘회고전’, ‘오픈 시네마’ 등 7개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개막작과 폐막작은 모두 홍콩출신 감독에게 돌아갔다. 개막작은 중국 귀속 이후 불확실한 미래로 달려가는 홍콩을 무대로 세 사 람의 운명과 역사를 말하는 웨인왕의 <차이니즈 박스>. 제레미 아이언스, 공리, 장만옥 주연이다. 폐막작은 홍콩의 대표적 여성감독인 쉬안환의 멜 로드라마 <반생연>.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는 베니스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일본의 <하 나비>,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 체리맛> 등이 상영된다. 왕가위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애초 계획과는 달리, 이번에도 역시 심의문제로 관계자들만의 특별시사로 수정됐다.

3가지 프로그램으로 짠 ‘회고전’에선 <외팔이 복서> <당산대형> <아비 정전>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 추억 속 홍콩영화들과 <하녀> <육식동물 > 등 최근 새롭게 주목받는 60년대 김기영 감독 작품이 선보인다. 아시아 신인감독들의 경쟁무대인 ‘새로운 물결’에는 6개국 11편이 초청됐는데 한국영화도 <초록물고기> <내안에 부는 바람> <모텔 선인장> 등 3편이 참 가한다.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애니메이션을 다룬 ‘와이드 앵글’ 부문 에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 <낮은 목소리2> 등이 상영되고, 최근 한 국영화를 소개하는 ‘한국영화 파노라마’에는 미개봉작 <억수탕>을 비롯 해 <산부인과> <비트> 등 10편이 참가한다. ‘월드 시네마’에는 16개국 21편이 참가, 유럽·미주지역 작품성을 갖춘 화제작이 참가한다. 야외상 영관에서 펼쳐질 ‘오픈시네마’에서는 데미 무어가 삭발한 등 대중성 높은 영화 9편이 상영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관, 시내 5개 극장(부 영, 부산, 제일, 국도, 아카데미 극장)에서 개최된다. 인터넷과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에 들어가면 출품작에 대한 안내와 개인 스케줄 작성 서 비스를 받을 수 있다(www.piff.or.kr, 천리안 go piff, 02-668-3237, 051 -257-2763).

이런 대형 영화제 외에도 동숭아트센터에서 10월2일까지 열리는 ‘우디 앨런 영화제’(02-776-3390), 문화학교 서울의 ‘러시아영화제’(10.1∼9 , 02-595-6002), 국내외 노동운동 소재 영화를 상영하는 ‘제1회 서울국 제노동영화제’(11.10∼12) 등 작은 영화제들도 올 가을엔 오롯하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