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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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보이는 권력’이 지배했다면, 현대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지배한다. 이 권력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때론 덮어두기도 한다. 그래서 지배층이 주장하는 사실과 대중이 생각하는 진실에는 일정 한 간극이 존재한다. 대중들은 이런 차이를 의식하고, 끊임없는 말들을 생산해 낸다. 말들은 가설이 되고, 발전하면 음모(Conspiracy)가 된다. 정답을 아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정보에 소외돼 있는 대중들은 일종의 피학적인 증상을 보이게 된다. 급기야는 귀에 도청장치가 달리게 되고, 케네디 암살이나 UFO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을 내세운다. 탈냉전주 의 시대의 새로운 적은 권력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이 점이 조엘 실버 감독의 <컨스피러시>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종착역은 엉뚱한 데 가 있다. <리쎌 웨폰> 시리즈의 명콤비였던 제작자 리처드 도너와 감독 조엘 실버, <어쌔신>의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언 헬겔란드와 <더록>의 촬영감독 존 슈 왈츠먼, 그리고 멜 깁슨과 줄리아 로버츠 주연. 포장은 훌륭한 셈이다. < JFK>, <대통령의 음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 시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점도 일단은 참신하다.
뉴욕의 택시운전사 제리 플리처(멜 깁슨)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료를 수 집, 다양한 음모설을 제조해 승객들에게 이를 누설(?)한다. 급기야 연모 의 대상 앨리스 수튼(줄리아 로버츠)에게 미국 대통령 제거음모를 이야기 한다. 이렇게 국가권력을 피부로 느끼는 플리처가 일종의 강박증세(방에 여러 개의 열쇠를 채우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음료수에도 자물쇠를 단다)를 보이는 것은 당연. 감독은 다소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으로, 잠재된 음모와 강박관념을 표현해간다. 하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모든 것이 혼돈스럽다. 감독 자신이 음모론에 취하고 만 것이다. 대통령 암살 음모 는 사라지고, 느닷없이 CIA가 일반 시민을 선택해 암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로, CIA가 조나스의 배후를 쫓기 위해 제리를 이용했다는 구도로, 영 화는 걷잡을 수 없다. 거창한 시나리오를 감당하지 못한 것일까? 감독은 음모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영화를 미지근한 칵테일로 만 들었다. 뻗어나온 가지는 영화의 기본 서사구조를 송두리째 감싸고 도무 지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이 <컨스피러시>가 첫주 박스오피스 1위 에서 다음주에 3위로 떨어진 이유다. 결국 <컨스피러시>는 훌륭한 감독이 란 적절한 가지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 이다.
김의수/ 영화평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