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시나리오, 음모냐 진실이냐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은 결코 ‘악인’일 수 없는 것일까. 이탈리아의 세계적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의 살인용의자 앤드루 쿠나난(27)의 아 버지인 모데스토 쿠나난(74)은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자리라면 세상 어 느 곳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9월초 아들의 일대기를 그리는 필리핀 영화 제작진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그는 “아들 앤드루는 결코 베르사체를 죽이지 않았으며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필리핀 태생으로 부유층을 주로 상대하던 ‘고급 남창’ 앤드루는 베르사 체 피살 직후 용의자로 지목받아 쫓기던 중, 사건 8일만인 지난 7월23일 베르사체의 저택에서 불과 몇㎞ 떨어진 마이애미 비치의 한 요트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주검이 발견된 직후 필리핀과 미국의 영화사들은 엽기적 연쇄살인에 다 상류층 호화생활자들의 은밀한 동성애 등 흥미로운 요소를 두루 갖춘 이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 근교의 유족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이에 아버지 모데스토는 “아들의 결백을 규명하려는 영화에 대해 서만 협조하겠다”며 버텨오던 중, 마침내 한 필리핀 영화사와 손을 잡기 로 했다.

아버지의 숙원대로 베르사체 살해사건에 한해서나마 아들의 ‘결백’이 입증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앤드루의 주검이 사건현장 근처에 서 발견됐다는 점과 목격자의 어렴풋한 증언 등 정황 증거 외에, 그가 베 르사체를 죽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아버지 모데스토와 제작진들은 “영화를 촬영해 가면서 아들 이 어떤 ‘음모’에 말려들었는지 구체적인 대체 시나리오가 짜여질 것” 이라며, 영화 수익금은 앤드루를 추모하는 교회나 사당을 세우는 데 쓰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어떤 ‘음모의 시나리오’가 각색될지 흥미진진하다.

임민 기자/ 한겨레 국제부 한겨레21